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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크레이프를 위한 행진곡

등록 2017-09-21 11:26수정 2017-09-21 11:30

?그림 김보통
?그림 김보통
초등학교 다닐 때 대학생인 사촌 누나가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당시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라 늘 시위가 많았고, 살던 곳이 서울대 근처여서 최루탄 냄새를 시시때때로 맡으며 자랐다. 사촌 누나는 가톨릭 청년회 소속으로 시위에도 많이 참가하는 이른바 운동권이었다.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났지만 같이 자주 놀았다. 주로 재미있는 노래라며 ‘반전반핵’이나 ‘5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운동권 노래를 가르쳐주고, 따라 부르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아직 꼬맹이인 사촌 동생을 교육시켜 혁명의 횃불로 키워보려는 원대한 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크레이프’라는 것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바로 이 누나다.

시위를 하면서 놀기도 노는 건지, 어느 날 누나는 나와 동생에게 말했다. “크레이프라는 게 있는데 먹으러 가자.” 아는 군것질이라곤 ‘달고나’와 ‘엿’뿐인 꼬맹이들이라 크레이프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게 뭔데?”라고 묻자, 누나는 “끝내주는 거야”라고 말하며 실실 웃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렇게나 행복한 표정을 짓다니 분명 맛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누나를 따라갔다.

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 신림역에 도착했다. 번잡한 거리에 쉼 없이 오가는 사람들과 현란한 상점 간판들을 보며 위축됐다. 동네 골목에서 딱지치기나 하던 어린 우리에게 그곳은 어른의 영역이었고, 그래서 무서웠다. 크레이프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안 먹어도 상관없으니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는 단호하게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얼마나 맛있기에 이런 혼란을 뚫고라도 우리에게 먹여 주려는 것일까. 어디선가 또 스멀스멀 최루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 평(3.3㎡)이나 될 법한 작은 가게 앞에 섰다. 누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크레이프 두 개를 시켜 나와 동생 손에 하나씩 쥐여 주었다. 난생처음 본 크레이프는 내가 알던 현란함을 아득히 뛰어넘은 디저트였다. 알록달록한 과일 위로 하얀 생크림이 잔뜩 얹어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초코 시럽과 딸기 시럽이 요란하게 뿌려져 있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먹기 좋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형상이었다. 난감해하고 있는 우리에게 누나는 “이렇게 손에 쥐고 막 먹는 거야”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게 뜻대로 될 리가.

용기를 내 한입을 먹으니 입 주변으로 잔뜩 생크림이 묻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입을 더 먹으니 아뿔싸. 크레이프 옆구리가 터지고 그 사이로 바나나가 삐쭉 튀어나왔다. 이쯤 먹고 그만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누나는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백담사 대머리 청문회 오리발 울화통 노가리 종필이 영삼 보수 대연합 지랄통” 하는 가사 완창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질질 흘리며 꾸역꾸역 먹었다. 누나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면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뒤 프랑스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크레이프를 먹었다. 어린 시절 먹던 것과 달리 얇은 전병에 초코 크림만 바른 것을 1.5유로(한화 약 2000원)에 팔았다. 먹기 편했던 것은 당연한 얘기.

그사이 전두환과 노태우는 재판을 받았다. 누나는 평범하게 결혼해 두 아이를 길러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혁명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많은 것들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다. 느리더라도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파는 크레이프는 여전히 현란해 그 뒤로 먹은 적이 없다.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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