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곽정은의 이토록 불편한 사랑
지난주 한 대학교에서 토크 행사를 마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스물두셋밖엔 되지 않아 보이는 앳된 외모의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보다 나이가 좀 많은 남자를 사귀고 있고, 그 사람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있지만, 저는 사실 결혼 생각이 없어요. 제가 그렇다는 걸 빨리 말해둘 필요가 있을까요? 나중에 원망을 듣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나이 차이 좀 나는 커플의 동상이몽’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사연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한꺼풀만 벗겨 보면 더 많은 진실이 드러나는 법. “결혼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하던 그는 나로 하여금 우리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가 맞닥뜨려야 하는 어떤 것들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웨딩드레스, 신혼여행, 보석과 예물, 안락한 집과 깔끔한 인테리어, 함께 장 보고 취미생활 하기, 나와 그를 닮은 귀여운 아기. 어쩌면 어떤 여자들은 자신의 결혼을 상상하며 이런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유지되기 위해서 여성으로서의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따로 존재한다.
남성 가사분담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독박육아, 출산과 육아에 부과되는 경력단절, 비정규직에겐 그림의 떡인 육아휴직과 불평등한 명절노동 그리고 ‘맘충’ 논란까지, 숱한 수치들과 경험담이 여전히 ‘결혼하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진짜배기 현실이며 이것이 결혼의 진실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살기로 굳게 맹세한 대가가,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능력과 관련된 어떤 것들이 서서히 혹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떤 여자가 흔쾌하게 결혼을 선언할 수 있을까? 물론 같은 일을 해도 여자와 남자의 임금 차이가 무려 37.2%(경제협력개발기구 2015년 자료)나 나는 나라이긴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는 그나마 좀 가능했던 1인분으로서의 삶이 결혼 후에 더욱 위축된다면 그것이 인생의 필수적인 여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굴까?
한 사람과 생의 마지막까지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의 종착지가 결국 가부장제라는 것은 서글프고 맥 빠지는 일이다. ‘아내는 되고 싶지만 며느리는 되고 싶지 않아’라는 여자들의 한숨 섞인 이야기가 그저 이기적인 말로 들린다면, 그게 이기적으로 들리는 만큼 당신은 가부장제의 시혜를 받는 존재일 것이다.
맞벌이를 해도, 심지어 여자의 수입이 더 많아도 ‘가장’의 호칭은 언제나 남자에게 주어진다. 그 알량함이 가부장제가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런 제도 따위 없어지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이 불합리한 가부장의 시스템 안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니, 사랑을 잃고 자아의 일부와 평등을 상실할 가능성이 큰 선택지 앞에서 많은 여자들은 더 많은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그 학생에게,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해둘 필요는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들인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운운하며 당신을 설득하려 할 수 있으니 그때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마침내 1인분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여자 혼자서도 1인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등하게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이게 그렇게 큰 꿈인가?
곽정은(작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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