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었다. 나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에, 그날도 엄마와 함께 성당에 갔다. 미사 후 유치원 수업시간에 미리 알록달록 그림을 그려둔 부활절 달걀이 담긴 바구니를 받았다. 껍질을 까보니 사인펜의 잉크가 배어들어 흰자가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먹었다. 즐거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도로로 뛰어들어 마침 달려오던 용달차에 치인 것이다. 엄마의 말로는 공중으로 ‘붕~’ 하고 떠오른 뒤 아스팔트 바닥에 두 번 튕긴 후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억나는 것은 전혀 없다. 깜빡 정신을 차려보니 울면서 나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용달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엄마 왜 울어”라고 물었으나 다음 순간 바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병원이었다.
부활절의 기적인지 빗장뼈 하나만 부러졌을 뿐 다른 곳은 멀쩡했다. 머리에 이상이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정밀검진을 했으나 정상이었다. 그날부터 나의 첫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긋난 빗장뼈를 고정시키고 갑옷 같은 깁스를 했다. 움직임이 요란한 어린아이였기에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놀았다. 역시 아이였기 때문인지, 남성 병실에 자리가 없던 것인지 여성 병동에서 생활했다. 병실엔 다른 골절로 입원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많았다. 아이는 아마도 나뿐이었다.
자주 울었다. 떼도 많이 썼다. 아프고 불편하기 때문은 아니고, 그렇게 안 사주던 군것질거리를 우는 폼만 잡아도 뚝딱 대령했기 때문이다. ‘환자라는 것은 편하구나’ 생각했다. 폭신하고 달콤하며 보들보들한 카스텔라를 가장 좋아했다.
카스텔라는 늘 김치와 먹었다. 왜 그렇게 먹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고구마를 김치와 먹는 것에서 착안한 것일까. 병상에 앉아 김치통을 열어놓고 카스텔라 한입, 김치 한입 먹고 있으면 옆 병상 할머니가 “맛있니?” 하고 물었다. 물론 맛있었다. 엄두를 내기 힘든 조합이었지만, 한번 맛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묻기만 할 뿐 시도하지는 않았다.
주사를 맞을 때면 늘 울었다. 혈관이 좁아 주사 자리를 잘 찾지도 못했다. 간호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꽃꽂이하듯 여기저기 바늘을 찔렀다. 더 이상 손에 놓을 곳이 없으면 발에도 맞았다. 나는 발악을 하고 울었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던 어머니도 울었다.
내가 사고를 당하던 날과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픈 건 난데, 엄마가 왜 울어?” 하고 물으면, “엄마도 아파” 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으면서도, 어머니만의 초능력인가 생각했다. 왜냐면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사의 경우로, 장난감을 사달라 울면 어머니는 냉정하게 병실을 나가버렸다. 먹다 만 카스텔라와 김치가 놓인 병상에 앉아 엉엉 울며 ‘엄마는 거짓말쟁이!’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까의 할머니가 “애기야 왜 울어, 울지 마”라며 속도 모르는 소리를 했다. 안 울면 장난감을 얻을 수 없는데 울지 말라니.
지금은 카스텔라와 김치를 함께 먹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는 카스텔라를 먹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왜 울었는지는 알 것 같다.
김보통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