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누리집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속이 시원합니다. 예전 같으면 권력자들의 담이 너무 높아 속앓이만 했을 고충을 솔직하게 올리니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청원’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뛰어넘어 정부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결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점이 뜨거운 인기의 비결이 아닐까요. 문화계 인사들이 만약 국민청원을 한다면 어떤 제안을 할까요? 설을 맞아 그들의 말랑말랑한 소원을 들어봤습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서로 배려 하는 공연 보고파, 김이나
독일 여행 갔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매주 열리는 무료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았습니다. 런치콘서트라고 해서, 일부 연주자들이 참여하는 짧고 캐주얼한 공연이었어요. 아이를 안고 온 젊은 부부, 휠체어를 타고 온 몸이 불편한 어르신, 일하다 잠깐 쉬러 나온 회사원 등 다양한 관람객들을 보았습니다. 공연 중 아이가 울어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우는 아이를 안은 채로 공연장 뒤에서 서서 보는 부모의 얼굴도 당황스럽지 않아 보였습니다.
입·퇴장 시 휠체어로 인해 초래되는 불편함도 베를린 시민들에겐 익숙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란 부담 없고 일상적인 버스킹(거리 공연) 같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큰맘 먹고 큰돈을 들여야 갈 수 있는 공연처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문화라는 것이 살에 닿아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습니다. 수입과 환경에 상관없이 이런 수준 높은 문화를 스낵처럼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예술이 ‘여유를 부릴 만한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는 도시가 우리가 사는 곳이라면 어떨까 상상을 해봤습니다. ‘열정페이’나 ‘좋은 뜻에 함께하는’ 취지로서 강요된 무료공연이 아닌, 문화 복지적 차원의 시스템이 꾸려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사가)
■애견인에게 면허증을!…박정윤
반려동물보호자 면허증 발급을 청원합니다. 체고 40㎝ 이상인 개는 산책 때 입마개를 씌워야 한다는 식으로 사람과 반려견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를 개에게 돌리는 방법은 너무 몰지각하고 구시대적입니다. ‘문제 동물’은 없습니다. 사람이 문제죠. 돈만 있으면 동물을 충동적으로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보완해야 합니다. 반려동물 등록제를 강화하면서 반드시 동물을 키우기 전, 동물에 대한 기본 지식과 동물을 대하는 매너를 배우게 해 자격증을 받은 사람만이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려동물 보호자 면허증은 운전면허와도 같습니다. 현재 사회문제가 되는 유기견이나 학대 문제는 물론, 사람을 공격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수의사)
■“확실히 웃겨드릴게요”…박준형
“확실하게 웃겨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 개그 프로그램이 많이 생길 수 있도록 관심 가져주세요!
“무를 주세요!~” 안녕하세요? <한국방송>(KBS) 예능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에서 이빨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갈았던 ‘갈갈이’ 박준형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벌써 15년 전이군요. 돌이켜보니 당시 ‘개콘’은 시청률이 20~30%에 이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더군요. <웃찾사> <개그야> 등 타 방송국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인기도 대단했고요. 그때는 그만큼 국민들이 많이 웃고, 행복해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민을 웃기고 싶어 하는 개그맨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이들이 설 무대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개그맨들이 ‘웃기는’ 본업을 포기하는 일도 빈번합니다. 지상파 방송국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건 ‘개콘’이 유일합니다.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행복은 ‘웃음’이 넘칠 때 가능합니다. 지치고 힘든 국민을 웃겨줄 이들은 개그맨뿐입니다.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개그 프로그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세요. 방송사당 최소 1개만 생겨도 국민들의 삶은 한층 밝고 유쾌해질 것입니다. ‘확실하게’ 웃겨드릴 자신 있습니다.
(개그맨)
■노포 지켜주세요, 박철민
5년 전입니다. 강원도 소양강 근처 화천 기슭으로 영화인 몇 명과 1박2일 여행을 갔지요. 배가 고파 식당을 찾던 차에 한 곳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어요. 20~30년은 족히 되어 보였죠. 차림표에는 ‘냉면’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평소 맛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저로서는 호기심이 들불처럼 일어났어요. “누구 없어요?”라고 말을 하자 낡은 기계가 보이는 주방에서 한 어르신이 나왔어요. “오래 기다릴 수 있쑤?”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예!” 합창을 했죠. 30분 이상 걸려 넉넉하고 시원한, 도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슴슴하면서도 우아한 평양냉면이 나타났어요. 한 젓가락 뜨는데 어디선가 냉면을 사랑한 시인 백석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냉면을 안주 삼아 소주 3병을 해치워버렸죠. 그날 노포가 준 감동은 오랫동안 잊지 못했어요.
한국엔 노포가 제법 있습니다. 빌딩이 올라가고 도로가 여러 갈래로 뻗어가면서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곳이 많습니다. 그런 곳들이 리모델링을 해 세련된 옷을 갈아입어도 섭섭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긴 세월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낡음 속에서 빛나는 맛이니까요. 궁이나 옛 건물 등은 정부의 지원으로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건물처럼 노포도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가져주고 응원해달라는, 아주 조심스럽고 소심한 청원을 해봅니다.
(배우)
■“전 3가지 소망이 있어요”…정여울
하나,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에 ‘나쁜 장난'을 치는 사람들을 엄벌에 처해주세요. 아픈 사람들도, 어린아이들도 걱정 없이 모든 음식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주세요.
둘, 여성들이 혼자 여행을 떠나도 무섭지 않은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요. 밤거리를 혼자 걸어도, 깜깜한 새벽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셋, 생리대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 학교폭력이 두려워 공부마저 포기하는 아이들이 없도록 해주세요. 누구든 두려움 때문에, 결핍 때문에, 열악한 환경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세상, 누구나 당당하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고 꿈꾸고 실천할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작가)
■불펌 누리집 처벌을!…하일권
웹툰 <목욕의 신>, <스퍼맨>, <마주쳤다>의 작가 하일권입니다. 저 같은 웹툰 작가들에게 큰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웹툰 ‘불펌’(창작자의 허락 없이 콘텐츠를 옮기는 것) 누리집입니다. 최근엔 오히려 포털보다 방문자 수가 더 많아질 정도로 창작 환경을 위협할 수준이 됐습니다. 매주 독자들과의 약속을 위해 밤을 새우고 각종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앓아가며 좋은 작품을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에겐 불펌 누리집은 암적인 존재와 다름없습니다. 웹툰 산업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제는 업계 자체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습니다. 범정부 차원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단속이 필요합니다. 마음 같아선 운영자에게 벌금 1000억원을 부과하는 법률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웹툰 작가 문하생 생활을 강제로 10년 동안 무보수로 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웹툰 작가)
국민청원
청원(請願)이란, 국민이 법에 따라 손해의 구제, 법률·명령·규칙의 개정 및 개폐, 공무원 파면 따위를 청구하는 일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6조에 국민의 청원권이 명시돼 있다. 서양에서는 전제군주 시대에 국민 구제 방법으로 청원제도가 처음 등장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나라에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엔 조선 태종 때부터 실시한 신문고(申聞鼓) 제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