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역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선 걷기가 필수다. 걸음은 오히려 눈보다 느리다. 한 걸음을 내딛기 전 눈은 한발 앞서 그 땅의 결을 살펴본다. 미처 차 안에서 보지 못했던 풍경을 발견하는 것은 걷기의 느림 때문이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일대는 걷기 좋은 곳이다. 일부러 걷기 좋은 곳을 모아놨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이 아니면 언제 또 걸어 보겠는가. 자연과 하나 될 수 있는 곤지암 일대 퇴촌면과 도척면의 ‘걷기 포인트’를 다녀왔다.
포근한 엄마 같은 앵자봉
지난 14일 오후 1시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과 곤지암읍, 여주시 금사면에 걸쳐 있는 산 앵자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르진 않았다. 길은 편안했다. 땅은 푹신했다. 봄이지만 아직 남은 낙엽 때문이었다. 앵자봉엔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거의 없고, 신갈나무, 노린재나무,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눈이 녹은 뒤 모습을 드러낸 갈색의 낙엽들은 등산로를 푸근한 융단 길로 만들어주었다.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낙엽은 발목과 무릎의 충격을 흡수했다.
한국의 산은 크게 두 종류다. 우람한 근육 같은, 돌과 바위를 자랑하는 설악산 같은 산과, 지리산처럼 깊지만 푸근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 말이다. 앵자봉은 후자다. 곤지암을 내려다보는 앵자봉은 꾀꼬리 둥지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실제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새끼를 품은 새 둥지처럼 포근함이 느껴진다. 바위가 거의 없이 땅으로만 이뤄진 산이라 오르기도 어렵지 않다.
오르기 쉽다고 해서 얕잡아 봐선 안 된다. 해발 고도가 667m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앵자봉은 길고 깊은 산이다. 동쪽으로 양자산, 서쪽으로 무갑산으로 이어지는 산세는 나지막하지만 끊이질 않는다.
앵자봉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자 성지인 천진암 순례 코스이기도 하다. 신유박해(1801년) 때 박해를 피해 도망친 천주교도들이 숨어들었을 정도로 심산유곡이다. 대부분 등산 코스는 천진암 주차장에서 시작해, 정상을 오른 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온다. 대략 10㎞ 정도로 결코 짧지 않다. 휴식 시간을 포함해 5시간 이상 걸리니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올라야 한다.
주차장에서 1시간여 올라 박석고개에 도착하자 숨이 차기 시작했다. 헉헉 소리가 나는 가쁜 숨이 아니라, 쌕쌕 소리 정도가 나는 기분 좋은 숨가쁨이었다. 길은 더욱 평평해졌다. 나지막하게 오르내리는 편안한 산등성이는 기분 좋은 편안함을 안겨줬다. 평일이라 그런지 등산객은 보이지 않았다. 낙엽 밟는 소리와 가끔 부는 바람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이 귀에 들리는 전부였다.
그렇게 1시간을 더 가자 정상이 나왔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꽤 좋은 풍광이 펼쳐졌다. 멀리 있는 경기 하남의 검단산, 서울 중랑구의 용마산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하산 등반로는 정비가 필요해 보였다. 대부분의 등산객이 정상에 오른 뒤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천진암 하산길을 이용하는데, 지금은 이 등산로가 폐쇄된 상태다. 이정표도 부실해 하산 방향이 제대로 표기가 돼 있지 않다. 기자도 길을 잘못 들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오를 만한 산이다. 쉬운 산이긴 하지만, 언 땅이 녹고 있어 미끄러운 부분이 중간중간 있으니 튼튼한 등산화는 꼭 챙기도록 하자. 코스가 긴 만큼 식수와 간식도 필수다.
가는 길: 지하철 경강선 초월역에서 내려 천진암행 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 이용 시 내비게이션 ‘천진암’ 검색 또는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또는 경기광주나들목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문의: 경기 광주시청 문화관광과 (031)760-2467
지난해 봄꽃이 만발한 화담숲. 곤지암리조트 제공
완벽한 데이트코스 화담숲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스키장은? 답은 곤지암 리조트다. 수많은 스키어들이 찾는 곤지암 리조트지만, 막상 리조트 바로 옆에 위치한 화담숲엘 가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스키 시즌인 겨우내 문을 닫았던 화담숲은 지난 16일 다시 문을 열었다. 개장 하루 전인 15일 먼저 다녀와 봤다.
봄비를 촉촉하게 머금은 나무들은 곳곳에 꽃망울을 터뜨릴 조짐이었다. 총 5.2㎞ 코스는 천천히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리지만, 특별하게 설계된 데크형(난간형) 산책로는 전혀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애초 설계 때부터 각도를 낮게 해, 노약자도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만든 편안한 산책로다. 이번 시즌엔 산책로 일부를 정비해 40분에서 2시간까지 다양한 코스로 산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숲 안의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더욱 편안한 관람을 할 수 있다.(요금 4000~8000원) 20분이면 숲 전체를 한 바퀴 돈다.
2013년 6월 문을 연 화담숲은, 숲을 모티프로 하는 면적 135만5372㎡(약 41만평)의 숲 테마파크다. 손에 꼽을 정도로 울창한 소나무정원과 이끼원을 비롯해 분재원, 반딧불이원, 수국원, 진달래원, 자작나무숲 등 15개의 테마원을 갖췄다. 국내외 자생식물 종류만 무려 4300종이 넘는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상태지만, 4월이 되면 진달래와 철쭉, 영산홍, 살구, 복숭아 등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고 한다. 여기에 할미꽃, 은방울꽃 같은 한국 야생화도 거든다. 둘러보니 히어리(조록나무과의 낙엽 관목), 생강나무엔 노란 꽃망울이 맺혀 있는 상태였다.
조금 올라가자 ‘약속의 다리’가 나왔다. 영원한 사랑을 염원하는 자물쇠가 난간에 줄지어 걸려 있었는데, 데이트 코스로 좋은 곳이라는 세간의 평이 실감났다.
화담숲의 압권은 숲 정상 부근에 있는 나무 난간 길(소정길)이다. 숲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이 난간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아직 녹지 않은 스키장의 설경과 숲의 전경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냈다. 이 난간 길을 빠져나오면 소나무정원과 분재원 등 볼거리가 이어진다. 이밖에 황쏘가리, 연준모치 등 민물고기와 장수풍뎅이 등 곤충들을 관람할 수 있는 자연생태관도 있다. 아이들 교육에도 좋을 듯싶다. 꽃이 만발하는 4월에는 관람객이 몰려 온라인 예매는 필수다. 입장료 성인 1만원, 경로·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
가는 길: 전철 경강선 곤지암역에서 택시를 타면 10분 정도 걸린다. 자가용 이용 시 내비게이션 ‘화담숲’ 검색 또는 중부고속도로 곤지암나들목, 영동고속도로 덕평나들목 이용. 자세한 정보는 누리집(hwadamsup.com) 참조.
경안천생태습지공원에서 주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생태계 보고 경안천생태습지공원
곤지암읍에서 차로 20여분 정도 걸리는 경기 광주시 퇴촌면 경안천에는 생태계의 보고인 생태습지공원이 있다. 습지공원 하면 흔히 순천만을 떠올리지만, 서울 근교에 이런 큰 습지공원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경안천습지공원은 1973년 팔당댐이 생기면서 농지와 저지대가 물에 잠겨 자연적으로 습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면적은 16만2000㎡(약 4만9000평)에 달한다. 광주시는 이 습지 둘레에 산책길을 조성해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특히 1년 내내 철새들이 노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 15일 방문했을 때도 천연기념물인 고니 몇 쌍이 습지를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이 보였다. 새를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들도 보였다. 산책길 길이는 2㎞ 정도로 천천히 걸으면 30~40분 걸린다. 군데군데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도 있고 쉴 수 있는 벤치도 잘 설치돼 있다. 인기척에 예민한 철새들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관찰대도 다섯 군데에 설치돼 있다.
직접 걸어보니 오르막길이라고는 전혀 없는 편안한 산책로였다. 무료인 주차장도 넓어서인지 평일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무성한 갈대와 습지가 인상적이었다. 산책 중간 “이야, 저거 봐” 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가보니, 습지 안에 팔뚝만한 메기가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생태계의 보고라는 말이 실감났다.
순천만 같은 거대한 습지는 아니었으나, 서울 근교에서 아름다운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환경 보호를 위해 동절기는 오후 6시, 하절기는 저녁 8시부터 출입을 금지하니 참조하자.
가는 길: 전철 경강선 경기광주역에서 내려 퇴촌행 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 이용 시 경안천습지생태공원 검색 또는 중부고속도로 경기광주나들목으로 나와 상번천리사거리→도마삼거리→광동로→광동사거리→산수로→경안천습지생태공원 순으로 가면 된다. 문의: 경기 광주시청 문화관광과 (031)760-2467.
곤지암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일반적으로 중부고속도 곤지암 나들목 일대를 칭함. 조선 중기 무신 신립의 묘 인근에 있는 큰 바위 곤지암(昆池岩)에서 이름을 따옴. 최근 곤지암 정신병원 괴담을 소재로 한 영화 <곤지암>의 개봉을 앞두고 ‘실검’(실시간검색어) 1위를 기록함.
경기 광주/글·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