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사교성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저 타인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적을 뿐이다. 대개의 시간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 어떤 모임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심술 맞은 고슴도치 같은 삶을 살았다. 친구도 매우 적다. 삼십대도 슬슬 끝나가는 즈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한명은 대학 신입생 때 만났다. 나는 재수를 했지만 그 친구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내가 나이가 한 살 많았지만 서로 반말을 했다. 형이라고 불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친구 역시 부를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만나면 서로의 가난을 자랑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샌드위치 패널(얇은 철판 사이에 스티로폼 또는 우레탄폼을 넣은 건축용 자재로 만든 단열재)’로 지은 집에 살고 있어 여름이면 방 안에서 아지랑이가 보였고, 겨울이면 코가 시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야 했다. 친구가 집에 놀러 와 좁은 나의 방에 누워 있을 때 이때다 싶어 “야. 나는 겨울에도 방에서 장갑 껴. 추워서”라고 말하자 친구는 “전기는 들어오네”라고 답했다. “학교 끝나고 올 때 애들한테 백원씩 빌려서 지하철표 산다”라고 하니 “대학은 다니네”라고 했다. 우리는 밤늦도록 서로의 가난을 자랑했다. 자랑할 것이 그것밖엔 없었다.
‘스타벅스’에 처음 갔던 것은 그 친구와 함께였다. 명동을 헤매다 스타벅스 앞에 멈춰 섰다. 당시만 해도 지점이 몇 없던 때였다. 친구는 말했다. “여기가 바로 커피 한 잔 값이 밥 한 끼 값인 곳인가” 매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들어가 볼까” 내가 말했다. “들어가 보자” 친구가 답했다.
우리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향기가 나고, 그럴싸한 음악이 들려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매장 한쪽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커피를 사 먹을 돈이 없었다. “좋겠네” 친구가 말했다. “비싼 커피를 마셔서” 부러운 눈치는 아니었다. 우리는 가난함에 대한 긍지 같은 것이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돈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진 않았다. 혼자였으면 괴로웠을지 모른다. 청승맞게 커피숍 밖에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을 수도 있다.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 역시 못했을 것이다. 친구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딱히 도움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랬다.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까?”
친구가 말했다. 축구선수 안정환을 얼핏 닮은 그를 아버지는 ‘쿠바 게릴라 같이 생겼다’고 했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할지도”라고 나는 말했다. 매일 과외를 다니며 끼니를 ‘뿌셔뿌셔’로 때우던 때였다.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던 세상은 아름답지 않았다. 부조리로 가득 찬 더러운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예감만 희미하게 있었다. “성공하면 커피 원 없이 먹어야지” 친구는 말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거야” 나는 말했다. 우리는 삼십여 분간 사람들을 구경만 하다 매장을 나왔다. 커피를 손에 들고 자리를 찾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안 팔리는 만화가가, 친구는 잘나가는 광고(CF) 감독이 되었다. “이제 부자가 돼서 목표가 사라졌어”라는 시건방진 소리를 하길래 돈 좀 달라고 했더니 무시하기까지 했다. 몇 달째 얼굴 한번 보자는 말만 하며 시간을 못 맞추고 있지만, 종종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사 먹을 돈도 없이 들어간 커피숍에 멀뚱히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던 친구의 표정과, 그런 친구를 바라보던 나를. 우리는 참 먼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그 커피숍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이제 와 보는 세상은 사뭇 달라졌는데 서로가 원하던 풍경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