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승 자동차 ’이세타’. 베엠베(BMW) 제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14억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자금은 전후 폐허가 된 유럽 사회에 일자리를 만들고 산업을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마이 카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중교통과 달리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에 따라 이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작은 스쿠터나 모터사이클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커가면서 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 작은 소형차를 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독일은 이미 1930년대에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건설하고 1938년 국민차 ‘비틀’을 만들어낸 자동차 선진국이었지만, 전범 국가였기 때문에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마셜플랜의 10%에 해당하는 금액밖에 지원받지 못했다. 전후 폭스바겐 공장은 영국군에 의해 관리되며 영국 군용 차량을 만드는 데 쓰이고 있어서 독일 서민들이 탈 만한 차는 충분히 만들 수가 없었다.
당시 모터사이클 제작에 집중하던 ‘베엠베’(BMW)는 어느 작은 이탈리아 회사의 소형차 아이디어에 주목했다. 동그란 계란형 차체에 뒷바퀴는 가운데로 모여 있고, 모터사이클용 엔진으로 달리는 2인승 차 ‘이세타’였다. 이 회사는 냉장고를 만들던 회사였기 때문에 문은 냉장고처럼 앞에서 여는 방식이었고, 운전대와 액셀러레이터 등의 조작 부품은 모두 문에 달려 있었다. 베엠베는 이 회사의 설계를 구입한 뒤 이를 보강해 1955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모양은 이탈리아의 오리지널 버전과 비슷했지만 같은 부품은 하나도 없었고 성능은 더 좋아졌다. 베엠베의 모터사이클 엔진 덕분에 가속이 더 빨랐고 최고 속도도 시속 85km에 달해 도로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었다. 동그란 형태 때문에 ‘버블 카(풍선 자동차)’라고도 불린 이 차는 가격이 당시 일반 승용차의 절반에 불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세타는 1962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아르헨티나, 스페인, 벨기에, 브라질,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산돼 16만여대가 팔렸는데, 이는 단기통 자동차 중 최고의 기록이다. 1960년대 이후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소비자들이 보닛(트렁크 덮개)과 트렁크가 달린 ‘진짜 자동차 같은’ 디자인을 선호하게 된 결과, 버블 카는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이세타 덕분에 베엠베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안겨줬고, 후속모델인 ‘700’도 성공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 베엠베가 고급 차에 집중하면서 초소형차 생산은 중단됐지만, 2002년 선보인 ‘미니’로 명맥을 잇고 있다. 미니의 작지만 탄탄한 달리기 성능, 감성적인 매력을 중요시하는 철학 등은 이세타 시절부터 내려오고 있는 전통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종도에 있는 베엠베 미니 드라이빙 센터에 가면 이세타가 활기차게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동헌(자동차 칼럼니스트·<그 남자의 자동차>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