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패션과 귀금속업계를 선도하는 명품의 나라이자, 미식 문화를 선도하는 맛의 제국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옷이건 귀금속이건 식재료건 간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들은 대게 값이 비싸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양왕’이라고 불렸던 절대왕정과 그 권위를 시민의 힘으로 깨뜨린 프랑스 혁명, 그리고 세계 제패를 꿈꿨던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복잡한 역사가 말해주듯, 그들의 문화는 ‘명품’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기 부족하다. 보편적이고 평범함 속에 진정한 ‘프랑스다움’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는 근대 프랑스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정부와 시민이 함께 산업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 급격하게 발전한 자동차 산업은 프랑스의 전후 경제를 좌우할 만한 기간산업이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진행됐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프랑스에는 22개의 승용차 메이커와 28개의 상용차(사업에 사용되는 차) 메이커가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회사가 난립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 데 비해 효율은 떨어졌다. 이랬던 상황이 산업 국유화가 진행되면서 50개의 자동차 회사는 10분의 1 수준으로 통합됐다.
1940년대 말에는 아직 자동차가 일반인에게 보급되기에는 비싼 상품이었다. 대부분의 자동차는 귀족 등의 부유층과 정부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앞으로의 산업은 유통과 운송에 의해 성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의 전통적인 산업인 농업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귀족을 위한 고급차, 그리고 일반인이 도심을 달리기 좋은 값싼 소형차를 제작하는 데 주력할 때, 프랑스 자동차 회사들은 농부들이 짐을 싣고 달리기 좋은 차, 원자재를 싣고 납품하거나 소상공인들이 장사할 때 타기 좋은 차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2차 대전 이전 세계 최고의 고급차는 프랑스에서 생산됐지만, 전쟁 이후의 자동차는 소수를 위한 사치품이기 보다는 국가 전체를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적당한 가격에 실용성 높은 차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판매되기 시작한 르노의 경상용차 ‘마스터’는 그 흐름에 있는 최신 제품이다. 안전성과 편의성이 높을 뿐 아니라 짐칸을 덮는 밴 형식으로 제작돼 달리는 도중에 화물이 떨어질 염려를 줄였다. 25만대 규모의 거대한 시장이면서도 독과점 구조인 탓에 오래 전에 개발된 차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경상용차 시장에 프랑스발 혁명이 올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동급 국산차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된 것을 보면 프랑스의 박애 정신은 그대로 실어온 듯하다.
신동헌(자동차 칼럼니스트·<그 남자의 자동차>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