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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죽음을 무릅쓸 맛이야!”

등록 2019-01-24 09:34수정 2019-01-24 20:12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그림 김태권 만화가
그림 김태권 만화가
① 돼지에 관한 이야기인가 - 중학생 때 읽은 글입니다. “송나라 사람 소동파가 ‘하 무슨 지방’의 돼지고기가 특별히 맛있다는 말을 듣고 돼지를 구해오라며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심부름하던 사람이 술을 먹고 돼지를 잃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아무 돼지나 구해 요리했는데 손님들은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었다며 칭찬했다. 사실이 밝혀지자 모두 부끄러워했다.” 얼치기 아는 체를 비웃는 내용. 중학생이 좋아할 주제라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았지요. ‘하 무슨 지방’이 어딘지만 빼고요.

② 복어에 관한 이야기인가 - 그런데 십여 년 후에 일본에서 나온 어류도감을 뒤지다가 저는 깜짝 놀랐어요. 한·중·일 세 나라에서 복어를 ‘하돈’(河豚)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혹시 하돈을 하 지방의 돼지로 옮긴 것은 아닐까.” 등줄기가 서늘해졌어요. 아는 체를 비웃던 저 역시 모르면서 아는 체한 것? 내가 틀릴 수도 있구나 명심했어요.

③ 소동파가 사랑한 돼지고기 - 십여 년이 다시 흘렀어요. 나는 때때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지요. 돼지일까 복일까. 헛갈릴 이유가 있어요. 소동파(본명은 소식)는 복어 마니아로도 돼지고기 마니아로도 유명했거든요. 돼지 요리 ‘동파육’이 소동파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을 정도니까요. 네모나게 썬 삼겹살을 약한 불로 오래오래 졸인 동파육. 하얀 기름을 입에 넣으면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죠.

④ 소동파가 사랑한 복어 - 한편 소동파는 복어도 즐겼어요. <혜숭춘강만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지요. “쑥이 땅에 가득하고 갈대가 싹이 올라온다/바로 복어가 올라올 철이로구나.” 황복은 바다에서 살다가 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는대요. 봄이 오는 풍경을 보며 복어부터 떠올리다니 무서운 식탐.

⑤ 죽음을 무릅쓰고 복어를 먹다 - 소동파가 어느 사대부 집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 그 집의 자랑은 복요리. 미식가로 유명한 소동파의 반응이 궁금해 사람들이 병풍 뒤에서 지켜봤대요. 소동파는 묵묵히 먹다가 큰소리로 외쳤답니다. “죽음을 무릅쓸 맛이야!”

⑥ 이덕무의 <하돈탄> - 조선사람 이덕무는 생각이 달랐어요. 복어가 맛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독이 있는데 굳이 먹어야 하냐며 <하돈탄>이라는 시를 썼지요. 복을 먹지 말자는 이유가 눈길을 끌어요. “하돈 역시 삶을 얻고/사람 또한 목숨을 연장하니.”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건강, 오늘날도 통할 논리 같네요. 아무려나 “죽음을 무릅쓴” 소동파에게는 먹히지 않을 테지만요.

⑦ 수수께끼의 책을 찾아서 - 아무튼 소동파의 손님들은 돼지고기 맛의 차이를 몰랐을까요, 아니면 복어가 무엇인지 몰랐을까요? 어류도감을 본 이후 중학생 때 읽은 문제의 책을 찾아 나는 생각날 때마다 책장을 뒤졌어요.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이 글을 쓰다가 <한자의 모험>이라는 책을 쓴 윤성훈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혹시 이 이야기의 출전을 아시는지?” “글쎄.” 몇 시간 후 답변이 왔습니다. “찾았음.” “헉, 어디서?”

이야기는 <구지필기(仇池筆記)>라는 책에 나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해요. “소동파가 말하기를, ‘예전에 기 지방에 머물 때 하양(河陽) 땅의 돼지고기가 맛있다고 들었다.’” 복어가 아니고 돼지가 맞네요. 등줄기가 서늘해졌어요. 십수 년 동안 혼자 엉뚱한 상상을 했군요. 내가 틀릴 수도 있구나, 다시 또 명심.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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