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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6 10:15 수정 : 2019.09.26 20:12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비판적인 글 쓰는 건 어려워
까칠함·주체적인 태도 등 필요
사실과 근거에 충실한 글쓰기 되어야 해
아무리 미워도 극단적인 표현 금물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두 갈래 길이 있다. 없던 걸 만들어 가는 길과 있는 것과 다른 걸 만드는 길이다. 둘 다 창의로 향하는 길이다. 다른 점은 앞의 길이 창조적이라면 뒤는 비판적이다. 비판은 다른 것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일이다.

새벽녘 잠결에 이런 번득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뭔들 아니겠어?”라고 한다. 최근 내가 손톱을 깎다 “어째 하나님은 손톱까지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주셨을꼬” 한 다음부터 아내가 내게 붙여준 별명, ‘뭔들’이다.

가시 없는 글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반론, 반박이 있어야 글이 박진감 있다. 주장을 반론하고 재반박하면서 엎치락덮치락 치고받는 글이 재밌다. 싸움 구경하는 흥미진진함이 있다. 일방적인 주장은 설득력도 떨어진다.

비판적인 글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주체적이어야 한다. 내 생각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내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영합한다. 동조하고 묻어간다. 남의 말과 글에 의지해 산다. 그런 사람일수록 관계가 중요하다. 내 의견을 남의 그것과 일치시키고 남과 보조를 맞추려 한다. 내가 그렇다. 나는 어지간해선 나서지 않는다. 손들지 않는다. 교실에서도 앞줄에 앉지 않는다. 관계를 위해, 또 어떤 때는 권위에 눌려 내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묻어갈 때 편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는 주체성과 함께 까칠함을 요구한다. 주체적으로 사고해도 ‘볼통볼통’하지 않으면 비판적이기 어렵다. 자신이 믿는 것을 따르는 주체적 사고에 머물러, 믿는 대상에 관해 의문을 갖지 않으면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맹목적이기 십상이다. 비판적이기 쉽지 않다. 나는 까칠함은 있다. 겉이 매끄러운 만큼 속은 까칠하다. 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속내를 생각하고, 속지 않으려고 애쓴다. 일종의 보상 욕구 같은 것이다. 나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는 까칠함이 영리함과 똑똑함의 척도다.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까칠함이 정의감의 동의어가 되기도 했다.

주체적이지 못한 상태가 까칠함과 만나면 불관용을 낳는다. 우리 세대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단일민족이어서 우수하다고 배웠다. 우리는 백의민족, 섞이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영화에서 미군은 늘 우리 편이었다. 인디언과 싸우는 기병대 나팔 소리에 환호했다. 베트콩 때려잡는 람보에 열광했다. 피아(彼我)구분이 단순하고 확실했다. 이런 생각이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지배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타자인지 감수성’이 취약하다.

관용 수준이 가장 낮은 단계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을 적대하고 증오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음으로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입장과 사정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다음으로는 내가 우위에 있고 권력을 쓸 수 있는 데도 용납하고 허용하는 경우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까불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상사가 부하에게,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갑질’하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다. 나를 핍박하고 박해한 사람이 반성하고 사과할 때 포용하는 것이다. 적대하고 증오하는 것 말고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과연 우리 사회의 관용은 어느 수준에 있는가.

직장 생활할 때 얘기다. 술자리에서 친한 후배가 내게 “선배님을 좋아하니까 하는 얘기”라며 내 문제점을 지적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너밖에 없구나. 다른 친구들은 뒤에서 욕하는데 너니까 그런 얘기를 해주는구나. 정말 고맙다”며 2차 가서 부둥켜안고 술을 마셨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 후로도 줄곧 그 친구만 보면 건방져 보였다. ‘감히 얻다 대고 지적질을?’ 온라인에서도 누군가 내 의견에 반대하거나 토를 달면 슬그머니 ‘친구 삭제’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얘기하는구나’ 하고 이해하는 게 아니고 ‘내 편이 아니구나’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고 나의 뇌가 그렇게 반응한다.

지금까지 주체성, 까칠함, 다름 받아들이기 등 비판의 태도에 관해 얘기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판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비판은 사실과 근거에 충실해야 한다. 사실 확인이 최우선이다. 의견을 사실로 둔갑시켜서도 안 된다. 또한 통계, 사례, 이론, 법률 등 타당하고 충분한 근거를 갖고 말해야 한다. 추측이 아닌 추론이 돼야 한다. 근거는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다수가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하는 역량도 필요하다. 설명을 잘하기 위해서는 비유와 예시, 분류, 비교에 능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읽는 이의 머리가 끄덕여지게 해야 한다. 아울러, 말하고자 하는 주제, 즉 논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접촉사고가 났을 때 잘잘못을 따져야지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물어선 안 된다. 비판 대상도 분명해야 한다, 뭉뚱그리면 날 선 비판이 될 수 없다. 방법론이 잘못된 것인지, 결정 사항에 관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인지, 도덕성을 문제 삼는 것인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논점이 흐려지지 않는다.

자체모순이 없어야 한다. ‘내로남불’, 이율배반, 아전인수(我田引水)여선 곤란하다. 자기검열과 자아비판을 통해 최소한의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아집을 부려선 안 된다. 나아가 같은 진영 안에서도 좀 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나와야 한다. 일사불란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분열이 아니라 분화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우리 편과 상대편만 구분한다. 무조건으로 수용하거나, 무차별적으로 배척한다. 동물처럼 유유상종한다. 끼리끼리 논다. 사자와 호랑이가 같이 놀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미워도 극단적 표현은 삼가야 한다. 모욕, 악담, 저주는 비판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위트와 재치로 되받아치는 여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주관만 있고 보편이 없다. 극단주의가 횡행한다. 자기 논리를 절대시한다. 모든 건 상대적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상식적이지 않다. 무모하고 위험하다.

감정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과거 청와대에서 일할 때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주장을 한 신문 사설이나 칼럼에 반박문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글에도 표정이 있고, 반론을 할 땐 흥분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흥분하지 않고 반론을 쓰는 법은 이렇다. 첫째, 문제 되는 부분을 적시한다. 며칠자 신문 무슨 제하의 칼럼에서 누가 이렇게 주장했다. 둘째, 한마디로 논평한다. 이때 글이 화난 표정을 짓거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툭 던져야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와 같이 가볍게 얘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왜 어처구니가 없는지 근거를 대 설명한다.

비판이 생산적이려면 결론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그쳐선 안 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대안을 놓고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 내가 A라고 생각했을 때 B라는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결론은 세 가지 중 하나다. 내 주장을 관철하든지, 아니면 B를 수용하든지, A와 B를 섞어 제3의 결론을 내든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상대의 생각을 잘 알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나 글을 읽을 때, 설득당하기 싫다. 그런 때 ‘너는 이렇게 생각하지?’ ‘나와 달리 이런 입장이지?’라고 하면 ‘저 사람이 내 생각을 알긴 아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수용성이 높아진다. 문제는 대부분 결론이 정해져 있고 절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비판과 토론에 대해 회의적이고 환멸을 느끼는 배경이다.

비판적인 사람은 행동한다. 남에게 미루거나 탁상공론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실천한다. 이런 사람에 의해 역사는 진보한다. 통념, 고정관념대로 살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힘 가진 사람의 세상에 머물 뿐. 이의를 제기하고, 토 달고, 말대꾸하는 사람에 의해 세상은 발전한다. 그런 사람은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한다. 모난 돌이고, 튀어나온 못이다. 눈엣가시다. 나는 두루뭉술하게 살았다. 까칠하지만 개기거나 대들지 않았다. 뒷소리는 잘한다. 힘센 사람 뒤에서 구시렁구시렁한다.

내 생각을 쓴다는 것, 남과 다르게 쓴다는 것, 그리고 실천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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