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0.09 18:54 수정 : 2019.10.09 20:59

그림 김보통 만화가

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그림 김보통 만화가
춘천에 일이 있어 다녀오던 날입니다. 저녁 느지막이 용산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려 했는데, 비가 오고 있어서일까 대기 줄이 길었습니다. 하필이면 우산도 없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는데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왜 줄을 서야 하는 거야?”

아이의 어머니는 답했습니다. “그래야 순서대로 택시를 탈 수 있으니까.” 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기 저 사람은 줄 안 서고 택시 탔잖아.”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택시 승차장으로 들어서려는 택시 하나를 잡아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도 줄 서지 말고 저기 가서 타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없었겠지요. 익숙해서 놀랍지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마트에서 계산하려고 줄을 서면 슬그머니 카트를 들이미는 사람을 만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산개해있던 사람들이 먼저 타기 위해 뒤엉키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비행기 착륙 후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돌진하는 것은 기본 상식처럼 느껴집니다. 충실히 줄을 선다는 것은 어딘가 손해 보는 기분입니다. 줄 서지 않고 잽싸게 자신의 목적을 이룬 사람이 유능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지 수단이 아니라는 말이 진리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도 저 사람처럼 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비겁할지언정 불법은 아니니까요.

“멈추세요.”

아까 그 누군가를 태운 뒤 유유히 떠나려던 택시 앞을 한 사람이 가로막았습니다. 손에는 경광봉을 들고 입에는 호루라기를 문 채였습니다.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경찰은 아니었고, 택시 승차장의 원활한 순환을 돕는 모범운전사였습니다. 그는 먼저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게 한 뒤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줄도 안 선 손님을 태우면 안 됩니다.” 이어 뒷좌석의 창문을 내리게 하고는 손님에게도 말했습니다. “내리세요.” 손님은 자리에 앉은 채 뭐라 항변했으나 모범운전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기 서 계신 다른 손님들은 한가해서 줄 서고 있는 것 같아요? 내리세요. 내려서 다시 줄 서세요.” 결국 택시 문이 열리고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손님이 내렸습니다. 모범운전사는 줄의 맨 앞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다음 손님 타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잠시나마 줄을 벗어나 편법을 써서라도 빨리 가려던 저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줄을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다리면 차례가 온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내 줄에 누가 끼어들 수 없고, 줄에서 벗어나 순서를 교란하는 누군가에겐 제재가 가해지며, 묵묵히 자리를 지킨 사람에게 원래의 몫이 돌아가리라는 신뢰를 기반으로 생겨날 것입니다. 줄을 서는 것은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미덕이 아닌 공동체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한 사회규범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수차례 다양한 곳에서 줄 서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들을 봅니다. 저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고, 많은 경우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세상은 그렇게도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는 손해를 봅니다. 그렇게 줄은 의미를 잃어갑니다. 더 많은 모범운전사가 필요합니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