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소한 일로 나를 오해한 선배가 내 인사를 아주 냉담하게 받았다. 그날 저녁 나는 앞으로 선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고민과 걱정에 뒤척였다. 아무렇지 않게 밝게 인사할까? 그랬다가 꼿꼿하게 행동한다고 더 싫어하는 거 아냐? 미안해하면서 인사하면 나으려나? 아냐,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학창시절 매년 반이 바뀌듯 회사도 주기적으로 부서가 달라지면 좋겠단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조직의 인간관계란 누군가 퇴사하거나 부서를 옮기기 전까진 미우나 고우나 이어지는 것 아니던가.
왠지 호감이 가서 더 잘해주고 싶은 동료나 죽이 잘 맞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편치 않은 동료가 있다.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그 선배의 경우처럼 오해가 쌓여서, 상대가 나를 만만하게 보거나 쉬운 일만 가져가는 프리라이더(free-rider)라서, 다른 이의 성과를 가져가는 얌체라서, 책임감 없는 동료라서, 또는 왠지 그냥 싫어서 등.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조직에서 선택할 대안은 그리 많지 않다. 불편한 감정을 감수하고 지내든지, 부드럽게 해결할 방법을 찾든지, 이도 저도 쉽지 않으면 정면으로 돌파해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부딪히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다. 모두와 좋은 관계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부조리한 행동을 해서 피해를 주는 경우라면 바로 잡아야겠지만, 단지 보기 싫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런 관계에 집착한다면 더 괴로워지는 건 나 자신이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데 행동 하나하나를 미워하며 해석하는 건 자신의 분노를 더 증폭시킬 뿐 아무 해결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너의 인생은 너의 인생대로, 나의 인생은 나의 인생대로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무심’하게 대하자. 상대의 행복과 기쁨, 슬픔과 좌절까지, 그의 인생은 순전히 그의 몫이라고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다 종종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를 위해서’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상대의 얼굴을 지우자.
그런데 불가피하게 매일 부딪혀야 하는 사이거나, 협업해야 하는 동료 혹은 상사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경우에 갈등을 풀지 않으면 점점 서로의 행동에 대해 바짝 날이 선 채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왜 나한테만 저렇게 불친절하게 행동하지?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될 일을 굳이 나한테 시키는 거야?’ 하는 식으로. 그러니 이때도 역시 ‘나를 위해서’ 내게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의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 낫다. 어느 쪽이든 먼저 다가가야 갈등의 실마리가 풀리는 법이다. 내가 먼저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로 했다면 관계에서 그보다 대인배가 되는 것이니 손해 보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자.
다짜고짜 불편했던 이유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 가볍게 다가가 툭 던져보자.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스몰 토크’로 빳빳해진 사이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 나에게 있었던 특별한 일이나 재미있었던 일화를 말로 건넸을 때 상대도 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면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시그널이다. 나를 미워하는 줄 알았던 사람이 예상 밖의 친절함을 건네면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던가. 이후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오해를 풀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높은 확률로 저절로 관계가 풀릴 수도 있다. 상대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을 듣다 보면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도 지나고 난 후 돌이켜보니 그때 왜 그렇게 싫어하고 불편했는지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대화가 어색하다면 사소한 변화를 챙기는 것도 좋다. 본래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누군가가 기억해주거나 마음을 써줄 때 감동이 배가 되는 것 아닌가. 상대의 생일에 “축하한다” 한마디 건네거나, 최근 성과에 대해 좋은 감상을 전하거나, 혹은 헤어스타일이나 의상에 대한 가벼운 칭찬을 해보자. 관심을 건네는 사람에겐 조금씩 호감이 쌓이는 법이니까. 이렇게 대화나 칭찬으로 틀어졌던 관계를 회복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직장 내에서 불편한 관계는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좁은 회사에서 인간관계는 수십번 변한다. (끝내 풀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동료도 더러 있겠지만) 절대 극복하기 힘든 갈등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 녹듯 풀리는 경우도 있고, 친했던 사이가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냉담한 관계로 변하기도 한다. 적에서 동지가 되고 동지가 적이 되기도 하는 것, 직장생활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기억해야 할 진리다.
임현주(MBC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