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언제 산 그림 한번 그리자!”

등록 2021-04-01 04:59수정 2021-04-01 08:04

서울 서대문구 안산 정상에서 그린 그림. 사진 김강은 제공
서울 서대문구 안산 정상에서 그린 그림. 사진 김강은 제공

“언제 밥 한번 먹자”가 예전 인사였다면, “코로나 잠잠해지면 보자”가 요즘 인사다. 만남이 미뤄지다 보니 여럿이 등산하는 것보다 혼자 등산하는 것이 더 많은 요즘. 신록과 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동네 앞산, 서대문구 안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피시티(PCT·미국 서부 약 4300㎞를 종단하는 미국의 3대 트레일 중 하나) 하이커 모임에서 친해진 수임이라는 친구였다. 가까이 살면서도 수차례 인사치레로 약속을 미뤄온 그와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머쓱했다. 화려한 ‘백조’로 돌아온 그는 운동 삼아 자주 안산에 오를 예정이란다.

돌아오는 금요일, 같은 장소에서 만나 안산을 오르기로 했다. 그와 나의 인연을 이어준 친구, 희남과 셋이서.

“우와~ 나 오늘 네가 그림 그리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응. 같이 그리자! 너도 오늘은 그림 그려야 해! 아주 재밌는 걸 가져왔거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안산을 천천히 걸었다. 아무것에도 쫓기는 게 없는 사람들처럼. 봄날의 이른 아침 공기는 신선하고 안산 자락길은 편안했다. 수십개의 길이 거미줄처럼 갈래갈래 나누어졌지만, 길을 잃어도 걱정 없었다. 새로운 길을 걸으며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지나기도,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진 풍경을 만나기도, 또 왕벚나무 아래를 걷기도 했다. 마른나무가지엔 여린 연둣빛 잎사귀들이 돋아났다.

30분을 걸어 정상인 봉수대에 도착했다. 295m의 야트막한 높이지만 서대문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봉수대 터 아래 위치한,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엔 북한산과 인왕산이 보였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작게 남산 서울타워가 내려다보였다.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소울팔레트’라는 컬러링 키트다. 누구나 쉽게 여행드로잉이라는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도록, 종이 한쪽에는 소량의 물감이 담겨있고 밑그림이 준비된 컬러링 키트다. 이 키트와 붓만 있으면 팔레트나 드로잉북, 물통 없이도 어디서든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소울팔레트는 대학 동기의 아이디어 굿즈인데, 산에서도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서울, 경기 5대 명산’ 버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종종 함께 그림을 그리고픈 친구들에게 나누어준다.

“자, 이걸 함께 그리자.”

“나도 꼭 그려야 돼…?”

많은 사람이 그림 그리기를 어색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만한 것이, 중학생 때 이후로 물감을 쓰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두 친구에게 컬러링 키트와 붓을 쥐여 주었다. 잔잔한 음악을 작게 틀었다.

“꼭 눈에 보이는 색깔대로 칠할 필요도 없고, 망쳐도 돼.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색을 채우는 데에 집중해 봐.”

미세먼지로 시야는 뿌연 풍경이지만, 봄바람과 볕이 따스해 그 나름대로 포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미세먼지 덕에 북한산과 인왕산이 짙은 파란색으로 보였다. 산 아래에 빼곡한 건물과 아파트들은 사각형으로 채우고, 작은 사각형 안에 더 작은 점들을 찍어 창을 그려 넣었다. 한참을 붓질하던 수임이가 말했다.

“이건 완전 아트 테라피인데!”

그 순간만큼은, 신경 쓸 것이 너무나 많은 복잡한 삶, 인간관계, 일 따위는 잊고 붓끝에 집중하는 시간. 잠깐 그리려던 것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림 그리기를 어색해하던 두 사람은 어느덧 대화도 없이 멈출 줄을 모르고 각자의 화폭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릴 거야?”라고 몇 차례나 물어볼 정도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훌륭한 작품 세점이 탄생했다. 자신만의 색감과 느낌을 가득 담은 그림들이었다.

“아주 재미있었어. 역시 해보지 않은 일은 해보는 편이 좋아.”

“넋 놓으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손만 움직였어. 머릿속 복잡함을 종이에 쏟아낸 느낌이야.”

그림을 어렵게만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연에서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알리기. 오늘 두 친구에게 제대로 영업 성공한 것 같아 뿌듯하다.

김강은(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