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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전용 목욕탕 ‘뻑적지근 수중난담’

등록 2009-02-26 19:26수정 2009-02-28 17:07

한 의원이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지하 2층 건강관리실로 불리는 목욕탕으로 들어서고 있다(왼쪽). 건강관리실 안 헬스장에서 의원들이 몸을 풀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 의원이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지하 2층 건강관리실로 불리는 목욕탕으로 들어서고 있다(왼쪽). 건강관리실 안 헬스장에서 의원들이 몸을 풀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뉴스 쏙]
새벽녘 탕에선 알코올 냄새 풀풀
13개뿐인 샤워기 자리다툼 빈번
여야 대표 ‘알몸 협상’ 벌인 적도

26일 아침 7시40분. 정세균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인 강기정 의원과 한나라당 차기 원내대표를 노리는 ‘친이계’ 중진 안상수 의원이 옷을 다 벗고 마주쳤다. 그들의 몸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 의원이 “아이고, 피곤해요. 국회를 또 전쟁터로 만드시려는 거예요”라며 ‘뼈 있는’ 웃음을 보낸다. 전날 한나라당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위원장이 언론법 직권상정을 시도해 국회가 고열의 몸살을 앓고 있어서다. 강 의원은 대책회의 등을 하느라 이날 새벽 2시30분이 돼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안 의원도 위로하는 듯하지만, 말 속에 ‘가시’를 온전히 발라내지 않는다. “허허, 강 의원. 원래 소수야당은 그렇게 피곤한 거예요.”

‘100분 토론’식 건조한 얘기가 아닌, 축축한 수증기 속에서 속내를 주고받는 이곳은 ‘건강관리실’이란 작은 팻말이 붙은 국회 의원회관 지하 2층 의원전용 목욕탕이다. 국회 의사당(본청) 밑 지하통로를 쭉 따라 걸으면 맨 끝에 다다르는 곳에 숨어 있으니, 일반인들은 모르는 ‘의원님’들의 사랑방이다.

1995년 문을 연 이곳은 17대 국회 초반까지 월 5만원의 이용료를 받았지만, 지금은 공짜다. ‘호텔급 목욕탕에서 물만 축내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호화로운 곳은 아니다. 작은 헬스장, 이용료가 8천원인 이발소, 2천원짜리 토스트를 먹을 수 있는 휴게실, 냉탕·온탕·열탕이 있는 목욕탕으로 이뤄져 있다. 목욕탕 ‘히트상품’인 노릿한 맥반석 달걀은 팔지 않는다. 강기정 의원은 “5개 입식 샤워기와 8개 좌식 샤워기가 있는데, 수압이 센 왼쪽 두번째 입식 샤워기가 인기”라며 “그 샤워기를 맡기 위해 면도기와 샴푸를 올려놓고 잠시 탕에 들어가면 다른 의원한테 그곳을 뺏길 정도”라고 말했다.

단골이 많아 의원들 사이에선 “목욕탕 교섭단체(20인 이상)를 꾸려도 되겠다”는 농담도 나온다. 강기정 의원,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처럼 지역구가 지방이라 의원실이나 국회 근처 원룸에서 지내는 의원들이 주고객이다. 아예 한나라당 황영철 의원처럼 지역구인 강원도 횡성에서 매일 새벽 5시 출발해 아침 6시20분께 목욕탕으로 직행하는 의원들도 있다. 한나라당에선 정몽준, 송광호, 허태열, 안상수, 권영세, 주호영 의원 등이 단골이고, 민주당에선 신학용, 강기정, 송영길, 김성곤, 이시종, 최규성, 김진표, 박은수 의원 등이 값비싼 호텔을 피해 이곳을 찾는다. 여성 의원들의 항의로 여성 전용 목욕탕이 17대 국회부터 뒤늦게 생겼지만, 남성 의원들에 비해 이용 빈도는 낮다.

회의 직전 들르는 의원들이 많아 아침 6~8시부터 옷장 속에 양복들이 죽 걸리고, 특히 국회에서 밤샘농성하거나 새벽까지 자료를 챙기는 국정감사 기간에 탕이 더 붐빈다고 한다. 한 의원은 “전날 밤 술자리들이 많아 아침 목욕탕 물에 녹아 있는 알코올 농도를 측정하면 음주운전 위반 수치를 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은 달라도 ‘탕’을 같이 쓰면서 ‘수중진담’이 오가는 게 이곳의 장점이다. 안규백 민주당 의원은 “국방위에서 여당이 반대한 법안을 목욕탕에서 이해를 구해 통과시킨 적도 있다”고 말했다. 강기정 의원은 “쌀 직불금 부당수령 의혹을 샀던 한나라당 의원이 목욕탕에서 억울하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고 전했다. 송광호 한나라당 의원은 “여기서 만나면 화목하고 친한 분위기다. 쟁점 사안이 있으면 서로 ‘양보 좀 하라’고 가볍게 얘기를 주고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연말·연초 입법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1월6일 합의’ 직전인 4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원내대표단이 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나 뜨거운 온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물만 축내는 곳이 아니라, 그래도 이곳의 물이 냉랭한 마음을 녹여줄 때가 있는 것이다.

송호진 성연철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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