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의 직선타구
김동훈 기자의 직선타구 /
이대진의 공은 뜨거웠다. 시속 150㎞를 넘나드는 ‘광속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 앞에 리그 선두를 질주하던 현대 타자들의 방망이는 굳어버렸다. 삼진, 삼진, 또 삼진. 관중석에선 “벌써 몇 명째냐”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1회말 4번 타자 스코트 쿨바부터 시작된 탈삼진 행진은 4회말 쿨바가 다시 타석에 들어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대진은 쿨바를 다시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10타자 연속 삼진을 완성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도달하지 못한 기록이고, 메이저리그에서도 딱 한 번 나온 대기록이다. 1998년 5월14일 인천구장의 주인공은 이대진이었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7일 군산구장. 그가 다시 마운드에 섰다. 수술을 7차례나 한 만신창이 몸이었다. 세월은 그에게 ‘구속’을 앗아갔지만 ‘경험’을 줬다. 구속은 140㎞를 넘지 못했지만 적절한 완급 조절로 그의 직구는 빠르게 보였다. 선발 등판해 5이닝 3피안타 무실점. 팀은 6-2로 이겼다. 노장의 역투가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이대진은 경기 뒤 “이제라도 팀에 힘을 보탤 수 있어 다행”이라며 웃음지었다.
이대진의 야구인생은 수술과 재활, 좌절과 시련을 반복하면서도 끝내 일어서는 ‘오뚝이’다. 그는 한때 먼저 세상을 떠난 팀 후배 투수 김상진을 기리기 위해 그의 등번호 11번을 달았다. 하지만 재기의 꿈이 점점 멀어지자 먼저 간 후배에게 누를 끼치기 싫다면서 등번호를 자진 반납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글러브를 벗어던지고 방망이를 잡았다. 광주 진흥고 시절 3년 동안 21개의 홈런 가운데 14개를 장외로 날려버릴 정도로 타격에도 소질이 있었다. 엘지 이상훈을 상대로 잠실구장 가운데 담장 앞에 떨어지는 주자 일소 3루타로 포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설 곳은 역시 마운드였다.
2007년 4월, 4년여 만에 감격의 선발승을 따냈고, 지난해 9월에는 프로통산 100승도 달성했다. 하지만 시즌 뒤 구단의 은퇴 압박에 시달렸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 등판해 12년 만의 우승에 힘을 보탰던 터라 서운함은 더욱 컸다. 간신히 팀과 재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번엔 ‘기흉’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병마가 찾아왔다. “이제 아파서 못 던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고개를 떨궜다. 기흉은 완치도 어렵고, 무리하면 안 되는 병이다. 나이 서른여섯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거듭된 하체 훈련으로 공에 다시 힘이 붙었다.
5일 1군 엔트리에 복귀한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광주구장에 들어섰다. “마운드에 설 수 있고,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노장의 미소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기만 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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