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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쥐나는 암호전쟁…“선수 10%는 못외워”

등록 2012-12-27 19:54수정 2012-12-28 13:34

프로야구 사인의 세계
연속 동작 갈수록 난수표
가짜와 진짜 사인 뒤섞어
팀당 2~3명은 못 알아들어
안타쳐도 사인 미스땐 벌금
작전 주루코치 거울 보며 연습
표정 안들키려 선글라스 쓰기도
“귀 한번 만지는 게 무슨 사인이야!”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의문 중 하나. 감독이 더그아웃에 앉아 모자 한번 ‘쓱~’ 만지는 걸로 경기를 움직인다니. ‘야구 무지인’들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작전을 얼마나 잘 짜느냐가 중요한 두뇌게임인 야구에서 사인은 전쟁터의 암호와 맞먹는다. 과거 망원경으로 상대 더그아웃을 훔쳐보고, 관중석에서 몰래 동영상으로 촬영하던 비매너가 난무했던 것도 사인의 중요성 때문이다. 주자를 시켜 포수 사인을 훔쳐보게 하는 등 사인 훔치기 논란은 요즘에도 끊이지 않는다.

사인은 공격 사인, 수비 사인, 배터리 사인(포수+투수)이 따로 또 같이 진행된다. 감독이 작전주루코치에게 내고, 작전주루코치가 선수에게 전달하는 공격 사인이 가장 복잡하다. 들키지 않으려 사인의 난이도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사인이 진화할수록 작전주루코치의 머리는 폭발한다. 공격 사인은 작전주루코치가 1년 동안 머리를 싸맨 결과물이다.

■ 오늘의 ‘키’에 함정까지 판다 공격 사인 동작은 작전주루코치가 스프링캠프 전에 만든다. 공격의 가장 기본인 ‘번트-히트앤드런-도루’에 대한 두세가지 유형(동작)을 미리 정해놓는다. 예를 들어 제1유형은 ‘손목(번트)-팔꿈치(히트앤드런)-어깨(도루)’, 제2유형은 ‘이마(번트)-턱(히트앤드런)-귀(번트)’ 식이다. 제1유형으로 운용하다 노출됐다 싶으면 제2유형, 제3유형으로 바꾼다. 2012 시즌 엘지(LG) 작전주루코치였던 송구홍 코치는 “번트에도 스퀴즈 번트, 보내기 번트 등 다양하다. 세부적인 사인 동작은 시즌 초반에 보완하거나 경기마다 정하는 등 감독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경기마다 바꾸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상대팀에 따라 유형을 바꾸기도 한다.

번트를 대라며 보란 듯이 손목만 터치하는 감독은 없다. 손목을 대는 앞뒤로 상대를 속이려는 동작이 붙는다. 경기 전 ‘세번째 터치한 동작이 진짜’, ‘귀 다음이 진짜’ 식으로 오늘의 ‘키’(Key·사인 약속 뜻으로 쓰임)를 정한다. 감독이 모자, 턱, 배 갖가지 부위를 터치하고 귀 다음 손목을 만졌다면 손목에 해당하는 사인이 진짜 작전이다. 요즘은 취소 동작도 있다. 경기 전 ‘바지를 쓰다듬는 동작은 취소’라고 약속한 뒤 어깨를 치고 바지를 쓰다듬고 턱을 쳤다면, 턱이 진짜 사인이다.

터치만 하던 것을 넘어 부위를 쓰다듬는 등 사인 동작은 갈수록 진화한다. 그래서 동작이 10번을 넘으면 복잡해진다고. 송 코치는 “동작이 복잡하면 우리 선수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간단하면 다른 팀에서 알아채기 쉬워 10번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했다. 속도도 조절해야 한다. 너무 빠르면 선수들이 못 보고, 너무 느리면 게임 진행에 지장을 준다. 어디든 만져도 되지만 오른쪽 손으로 왼쪽 귀를 잡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피한다. ‘모자 다음은 턱’ 식의 흔한 순서도 피해야 한다. 코는 턱과 헷갈릴 수 있어 요즘은 안 만진다고. 송 코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물 흐르듯 부드럽고 정확하게 짚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동작이 정해지면 작전주루코치들은 몸에 익힐 때까지 거울 보며 연습한다. 2012 시즌 롯데 작전주루코치였던 박계원 코치는 “시합 전에 5~10분 연습하고, 수비 시간에는 안에 들어가 거울 보며 연습한다”고 말했다.

■ 사인 못 읽는 선수가 ‘복병’ 갈수록 복잡한 사인에 선수들도 머리 아프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면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번 시즌 사용할 사인 유형을 알려준다. 보안은 필수. 박 코치는 “유출되지 않도록 메모 등으로 나눠주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직접 설명한다”고 말했다. 연습경기를 하며 ‘번트 사인이 뭐냐’ 돌발질문도 해가면서 선수들이 몸에 익히게 돕지만, 아무리 해도 못 외우는 선수는 팀당 2~3명씩 꼭 있다. 한 구단 관계자는 “팀마다 선수의 10%는 아무리 알려줘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처법은 있다. 코치 나름의 방식으로 간단하게 알려주거나 무조건 치게 한다고. 사인을 못 읽는 선수가 1루에 출루하면, 1루 베이스 코치가 꼭 붙어 사인의 뜻을 알려줘야 한다. 그 허점을 상대방이 놓칠 리 없다. 이 관계자는 “상대편에 어떤 선수가 사인을 못 읽는지 대충 안다. 그 선수가 나오면 무조건 칠 거로 생각하고 대비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대비해도 실수는 나온다. 감독이 별생각 없이 가려워 귀를 만졌는데 작전주루코치가 사인으로 착각해 선수에게 전달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 작전주루코치는 “초보 코치 시절 감독이 매일 키를 바꿔 헷갈려 사인을 잘못 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말했다.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는 그나마 고맙다. 이 코치는 “번트 사인을 냈는데 선수가 모르고 쳐 안타가 된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인미스한 선수는 팀에 벌금을 내야 한다.

■ 표정 감추려 선글라스 작전주루코치의 세계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은 책 <김성근이다>에서 “2002년 엘지 감독 시절 상대 코치가 내 사인을 읽고 포수에게 알려주는 걸 눈치챈 뒤, 가짜 사인으로 상대 팀을 혼란시켜 승리한 적이 있다”고 썼다. 그러나 사인을 간파 당하는 것은 작전주루코치에겐 직무유기다. 그래서 이들은 늘 새로운 동작을 창조해내려고 끊임없이 공부한다. 미국프로야구 영상은 물론 클래식 공연 등 온갖 동영상을 챙겨 본다. 박 코치는 “늘 머릿속으로 어떤 동작을 만들까 고민하고, 떠오를 때마다 메모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동작을 유심히 살피는 직업병까지 생겼다.

경기 중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작전주루코치는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을 늘 주시해야 한다. 감독이 작전을 주는 타이밍은 경기 전 미리 정하지만,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에 사인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력도 좋아야 한다. 포커페이스도 필요하다. 감독이 사인을 안 줘도 작전주루코치들은 상대 팀을 속이려고 사인이 나온 것처럼 선수에게 ‘페이크 사인’을 줘야 한다. 송 코치는 “감독 사인이 안 나면 당황해 표정이 달라지는 코치가 있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선글라스를 착용한다”고 말했다.

승패에 결정적 구실을 하는 만큼 작전미스가 나오거나 경기에 지면 ‘내 탓’이라는 생각에 괴롭다. 송 코치는 “내가 잘못해서 진 것 같다는 생각에 잠 못 자며 더 새로운 동작을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인은 시즌마다 정기적으로 바꾸지만 트레이드 기간엔 다 바꿔야 한다. 팀을 옮긴 선수들이 전 팀의 사인 유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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