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중 기자의 풀카운트
영화 <머니볼>에서 메이저리그 구단 오클랜드의 빌리 빈 단장은 선수들에게 “상대가 번트를 시도하면 그냥 대줘라. 아웃 카운트 하나를 거저 주는 셈이니까 고맙게 받아야지”라고 말한다. 희생번트가 경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함을 강조한 대목이다.
통계를 근거로 희생번트가 별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 미국과 일본, 한국 프로야구에서 수십년간 누적된 통계는 노아웃에 1루 주자가 있을 때의 득점 확률이, 번트를 성공시킨 뒤 원아웃 2루 주자가 있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번트 실패 확률까지 고려하면 번트 작전은 오히려 득점 확률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야구는 통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 작전 하나의 성공 여부에 따라 경기의 흐름이 바뀌고 승부가 결정되기도 하는 등 심리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게 바로 야구다.
올 시즌 한화는 125경기에서 128개의 희생번트를 성공시켰다. 희생번트로는 압도적인 1위다. 2위인 에스케이와는 무려 39개 차이가 난다. 희생번트가 가장 적은 넥센의 54개보다 2배 이상 많다. 시즌 초반 한화는 4번타자인 김태균도 희생번트를 대고 2루 도루를 감행하는 작전으로 상대팀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요즘 한화의 희생번트는 상대를 놀라게 하는 작전이 아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작전이다. 지난 8일 경기가 대표적이다. 한화는 엘지를 상대로 12회초 무사 1, 2루의 기회를 잡았다. 5시간이 넘게 진행된 경기를 끝낼 수 있는 기회였다. 타자는 경험이 많지 않은 포수 박노민이었다. 박노민은 번트 자세를 취했고, 엘지의 1루수와 3루수는 번트를 대비해 수비 위치를 앞당겼다. 타자가 번트를 대면 바로 공을 잡아 선행주자를 잡을 기세였다. 부담을 느낀 박노민은 투 스트라이크가 될 때까지 번트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엘지는 투 스트라이크가 되자 1루수와 3루수의 전진수비를 풀었다. 박노민은 3루 주루코치에게 사인을 받고 고개를 끄덕인 뒤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 임정우가 던진 공은 낮은 직구였다. 박노민은 몸을 한껏 웅크리며 번트를 댔다. 스리번트 작전이었다. 공은 뒤쪽으로 튀어 파울이 됐다. 어이없게 아웃 카운트가 늘어난 한화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12회말 끝내기 역전타를 허용했다.
한화가 올 시즌 번트 실패로 기회를 놓친 경기는 많다. 지난달 30일 두산전에서는 7, 8, 9회에 한차례씩, 세번의 번트 실패로 역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득점권 타율이 3할4푼5리에 이르고 출루율이 4할이 넘는 이용규에게 번트를 두번이나 지시했고, 두번 모두 발이 느린 선행주자 조인성이 아웃됐다. 김성근 감독은 출루율과 득점권 타율이 높은 김경언, 이용규에게도 자주 번트를 지시한다. 주자가 발이 느린 경우에도 희생번트 작전이 자주 나온다. ‘데이터 야구’로 정평이 난 김성근 감독이 희생번트 작전에서는 데이터를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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