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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야구·MLB

‘야구 선수 이정후’가 아버지 이종범에게 띄우는 편지

등록 2017-05-04 11:49수정 2017-05-04 11:54

“‘헝그리 정신’으로 야구했다는 아버지의 말씀, 이젠 알 것 같아요”
5월은 가정의 달. 그러나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없다. 6년 전 당시 현역 최고참 선수였던 이종범 <엠비시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광주 무등중학교에서 야구를 하고 있던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편지(이종범,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를 썼다. 다시 찾아온 5월, 이제 프로야구 새내기 선수가 된 아들 이정후(19·넥센 히어로즈)가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전한다. 편지체로 대신 한다.

넥센 히어로즈 새내기 이정후(왼쪽)와 그의 아버지 이종범 <엠비시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넥센 히어로즈 제공.
넥센 히어로즈 새내기 이정후(왼쪽)와 그의 아버지 이종범 <엠비시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넥센 히어로즈 제공.
아버지, 저는 지금 고척 스카이돔 라커룸에서 선수단 미팅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선수셨을 때 늘 이런 준비를 하셨겠죠. 행동 하나 하나에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제가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야구 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반대하셨죠. 3학년 때까지는 기다려 보라고 시간을 주셨잖아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든 게 야구라고, 잘 생각해 보라고도 하셨고요.

그래도 전 야구가 너무 좋았어요. 아버지가 야구 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멋있었거든요. 사촌형(LG 윤대영·현재 경찰청 소속) 야구하는 데 따라가서 같이 하면 진짜 재미 있었어요. 골프도 해 보고 축구도 해 봤지만 야구만큼 신나지는 않았어요. 지금도 야구가 왜 좋은지, 왜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보고 자란 게 야구니까 그렇지 않을까도 싶네요. 야구장에 처음 갔던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요.

아버지께 “정말 잘할 자신이 있다”고 다짐하고 야구를 시작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왼손타자를 하라”(이정후는 원래 오른손잡이다)고만 조언해 주셨잖아요. 다른 말씀은 전혀 안 해주셨고, 기술 같은 것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죠. 감독님, 코치님 지도대로 하라고. 그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만 하셨죠. 그래도 전 하나도 안 섭섭했어요. 아버지는 그냥 우리 아버지니까…. 나름 많이 참으셨던 것도 알아요. 하긴 제가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도 있는 것 같네요.

아버지는 제가 경기에서 못 하거나 잘 하거나 집에 돌아오면 항상 “잘했다”고 칭찬과 격려만 해주셨잖아요. 생각해보니 야구 시작하고 지금껏 아버지께 야구로 혼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거죠. 경험상 경기를 망치면 가장 속상한 게 선수 본인 자신이라는 것을. 승부 근성은 아버지보다 더 강하다고 늘 주변에 말씀하셨으니까 제 마음을 헤아리셨던 거겠죠.

“잠 많이 자고 밥 많이 먹어라.” 프로에 입단한 뒤 아버지가 유일하게 강조하신 말씀이죠. 144경기를 치르려면 가장 중요한 게 체력 관리, 컨디션 관리라고. 그래서 경기에 져서 분하고 화나고 그래도 잠은 꼭 많이 자려고 해요. 몸무게도 4년 내 90㎏(지금 78~79㎏)까지 늘리려고요. 그래야 타구에 힘이 실릴 테니까요. 지난 겨울에 그랬던 것처럼 비시즌에 하루 6끼 먹어야죠. 그러니까 아버지도 고기 많이 사주셔야 해요.

어릴 적에 아버지가 가끔씩 하셨던 말씀이 기억 나요. 아버지는 집이 가난해서 ‘헝그리 정신’으로 야구를 했다고. 사실 그때는 어려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몰랐어요. 지금은 그게 가족을 위해 선택한 아버지의 길이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요.

한 달간 1군 경기를 뛰어보니 프로라는 세계가 얼마나 힘든 곳인지 알게 됐어요. 처음 야구 선수가 된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걱정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 것 같고요. 그런데 아세요?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알 것 같다는 것. 아버지가 프로 유니폼을 입으면서, 그리고 그라운드로 뛰어 나가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감이 와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모두 부모님 덕분입니다. “아버지처럼만 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지만 사실 아버지의 야구 명성은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바람의 손자’가 아닌 ‘야구 선수 이정후’로 한 번 당당히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일희일비도 하지 않으려고요. 그게 아버지를 닮아 같은 길을 가려는 제 나름의 방식입니다. 어머니께는 문자로 가끔 말씀드린 것 같은데 아버지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아버지…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아들 정후 드림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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