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무용평론가
기고
홍명보 코치는 16강 탈락한 한국 대표팀에게 "기술을 쌓으라"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확실히 한국 축구의 기량은 발전했지만 어떤 한계가 만져진 듯한 느낌이다. 체력전과 스피드만으로 세계 축구의 흐름 속에서 강자로 행세하기는 곤란하다는 것.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축구의 인프라 구축과 저변 확대는 많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축구의 기본기는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확실하게 다져질 것이 분명하다. 현재 한국 축구는 이 정도인 것이 냉정한 판단이지만,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다만 세계 축구의 흐름을 정확히 볼 필요는 있다. 토탈사커 이후 압박 축구는 세계 축구 모델의 정점인 양 제시되었다. 미드필드 장악을 통해 지속적인 압박, 간결하면서도 스피디한 패스 게임, 개인 능력보다는 조직력 등등이 압박 축구를 말해준다. 이러한 모델은 개인기가 뛰어난 남미 축구나 피지컬이 뛰어난 유럽 축구 뿐만 아니라 축구의 변방에도 고루 통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제 단순한 압박 축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압박 축구 안에서 다시 내적인 분화가 가해지고 있다.
가나 축구를 보라. 뛰어난 신체조건, 유연성, 체력 할 것 없이 모두 갖추기는 했지만, 이들의 축구에게 가장 눈에 띄는 미덕은 바로 리듬 감각이다. 공수의 리드미컬한 전개는 마치 춤을 추듯 아프리카의 고유한 리듬 체계가 고스란히 가미되어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축구라는 듯이.
반면 일본 축구를 보라. 예쁜 패스로 미드필드를 통과하기는 하지만, 그 다음이 없다. 축구에 있어서도 지나친 서구화를 통해 일본적 색깔이 사라진 것이다. 차이가 없는 세계 축구의 추종은 단지 아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이제 축구는 압박 축구의 모델 속에 각 민족의 고유한 신체 리듬을 반영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칠까. 왜 각국의 사람들은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물론 골맛의 쾌감, 승리의 엑스터시는 특별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종족, 민족이 가진 특별한 신체, 그 신체의 리듬이 문화적 형식으로 축구에 덧입혀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막강의 전력을 가진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16강전은 최고의 시합 중에 하나였다. 왜냐하면 양국의 선수들은 남미 내부에서 다시 세밀한 문화적 차이, 리듬의 차이를 드러내는 축구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박력만점의 박빙 승부를 펼쳐갔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로 손꼽히는 리오넬 메시나 테베스 같이 특출한 스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고유한 개성을 뽐내면서 조직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승부는 연장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 끝에 아르헨티나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축구의 부분과 전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는 좋은 게임 내용이었다.
우리 축구는 어떠한가. 리듬 감각이 없고 선형적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근대적이며 체육적이다. 체력과 스피드가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드리블에서 볼 트래핑, 슛 등등의 테크닉에서 공수의 전체적인 리듬에 이르기까지 다소 기계적이며 직선적이다. 단지 설기현의 크로스, 박지성의 드리블, 안정환의 슛에서 고유한 리듬이 느껴지지만, 모든 선수들에게 그러한 리듬 감각이 느껴져서 음악적인 축구, 선율적인 축구가 나타나야 한다.
리듬이 왜 중요한가 압박축구는 90분 내내 미드필드를 중심으로 쉬지 않고 압박을 가한다. 엄청난 체력을 요하며 마치 축구-기계처럼 정확하고 스피디해야 한다. 그것은 리듬으로 치면, 정박자에 해당한다. 그런 정박자의 축구는 세계 축구에 모두 공통적이다. 체력의 소중함, 스피드의 절실함을 느끼지 않는 팀은 없다. 그러니까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체력으로 승부가 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러한 정박자의 리듬을 헤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엇박자의 리듬이다. 엇박자는 정박자로 압박해오는 수비 사이로 나아가게, 돌파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라운드에서 이러한 엇박자의 리듬이 가장 잘 시각화되는 경우는 물론 드리블할 때이다. 브라질의 호나우지뉴가 보여주는 삼바 리듬의 드리블은 막을 수가 없다. 삼바는 독특한 엇박자의 스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아르연 로번이나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 역시 자세히 보면, 스피드 뿐만 아니라 고유한 엇박자의 리듬을 갖고 있기에 세계 최고의 드리블을 구사하는 윙포워드로 군림할 수가 있다. 또한 박지성이 빠르지는 않지만 오뚜기처럼 넘어지지 않고 교묘하게 상대의 틈새로 돌파해 들어갈 수있는 것도 엇박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리듬에 있어서 스피드는 오히려 상대적이다. 우리 축구는 무조건 빠르기만은 요구하는 경향이 아직도 농후하다. 빠른 것이 미덕이긴 하지만, 때로는 느린 것이 엇박자의 리듬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이미 압박 축구는 스피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도 이제 음악을 들어야 한다. 기본기에서 고난도의 테크닉, 전략전술을 익히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지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서 상대와는 다른 리듬을 구사하며 '코리아'의 문화적 색채가 가미된 축구를 해야 한다. 물론 악착같은 '근성'과 '체력'은 세계 축구가 한국 축구에 보내는 감탄의 정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미래를 기약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리듬의 입장에서 볼 때, 창의성은 정박자와 엇박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대위법 현상이다. 즉 빠르게 가는 층과 느리게 가는 층이 절묘하게 배합될 때, 생기는 틈, 사이, 여백을 창조하는 음악적 현상이다. 개인성의 재발견 한국 축구는 투박하긴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팀컬러를 가졌다. 한마디로 아일랜드 축구처럼 끈적끈적하고 저력이 생겼다. 유럽 축구와 마주하기도 전에 내부의 두려움 때문에 서서히 패닉 현상에 빠졌던 과거는 이제 과거의 우스개로 변해다. 두려움 없는 축구. 그만큼 콤플렉스 없이 진취적이며 패기만만하다. 하지만 그러한 팀컬러가 지나치게 팀웍이라는 구심력 속에 머무르는 것은 안될 것이다. 일단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확장하고, 그 다음에 팀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탈개인화된 팀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천수에 대한 비난이라든가 박주영에 대한 불신은 '튀는 개성'을 못 미더워하는 조직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가정법은 소용없지만, 이번 월드컵에 히딩크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더욱 더 한국 선수들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모험적이며 창의적인 축구를 권유하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능력에 따른 신인의 과감한 기용을 했을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너무 신중하고 보수적인 선수 기용이 팀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 가둬놓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지. 압박 축구에서 다시 개인성을 발견해야 한다. 이때의 개인성은 토탈사커 이전의 개인기의 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성적인 리듬을 팀에 불어넣어 풍요롭게 하고, 축구 전체를 재미있게 만드는 의미에서 개인성이다.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통해 변속하고 변주하고 게임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이천수는 이러한 개인성의 요구에 합당하게 드리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는 빠르기는 하지만, 현재로선 1대1 돌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력해결 능력이 엿보이지 않는 그에게 '수비 뒷공간을 노려라' 라는 지극히 당연한 충고는 막연하기만 할 뿐이다. 박주영은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신체 리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 케이스이다. 아직 경험치가 적다는 이유인지, 피지컬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 아르헨티나의 사비올라 같은 경우를 봐도 충분히 과정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압박 축구의 전체적인 기조는 유지하되, 빡빡하게 전개되는 승부에서는 상대의 5%를 빼앗아오는 엇박자의 리듬을 구사할 수 있는 개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대표팀의 모든 선수가 그러한 리듬을 전체 팀의 전개에 불어넣어야 하고, 공수의 전체 선율적인 리듬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음악적으로 받아들이고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닐까. 이번에 프랑스는 결국 토고 축구를 넘어서서 16강에 진출했다. 늙은 아트 사커라고 비아냥댔지만, 프랑스 축구는 후반 체력은 고갈되어도 리듬 터치가 있고 유려하고 세련된 흐름을 탈 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의 한계를 딛고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 반면, 스위스는 아직 미성숙한 팀컬러로 볼 수밖에 없다. 진정한 강자의 축구는 그 민족의 고유한 리듬을 한 개인의 신체를 통해 전체 팀의 축구 색깔에 섞어넣고, 그러한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경기를 지배하고 결국 승리를 따내는 것이다. 가나 축구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그들이 아프리카 민속춤을 연상시키는 리듬 속에서 상대를 자신들의 페이스로 몰아넣듯이 우리도 탈춤의 리듬, 사물놀이의 리듬으로 상대에게 엇박자의 낯설 충격을 안기면 어떨까. 그러면서 현재의 압박 축구를 구사한다면,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남수 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리듬이 왜 중요한가 압박축구는 90분 내내 미드필드를 중심으로 쉬지 않고 압박을 가한다. 엄청난 체력을 요하며 마치 축구-기계처럼 정확하고 스피디해야 한다. 그것은 리듬으로 치면, 정박자에 해당한다. 그런 정박자의 축구는 세계 축구에 모두 공통적이다. 체력의 소중함, 스피드의 절실함을 느끼지 않는 팀은 없다. 그러니까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체력으로 승부가 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러한 정박자의 리듬을 헤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엇박자의 리듬이다. 엇박자는 정박자로 압박해오는 수비 사이로 나아가게, 돌파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라운드에서 이러한 엇박자의 리듬이 가장 잘 시각화되는 경우는 물론 드리블할 때이다. 브라질의 호나우지뉴가 보여주는 삼바 리듬의 드리블은 막을 수가 없다. 삼바는 독특한 엇박자의 스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아르연 로번이나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 역시 자세히 보면, 스피드 뿐만 아니라 고유한 엇박자의 리듬을 갖고 있기에 세계 최고의 드리블을 구사하는 윙포워드로 군림할 수가 있다. 또한 박지성이 빠르지는 않지만 오뚜기처럼 넘어지지 않고 교묘하게 상대의 틈새로 돌파해 들어갈 수있는 것도 엇박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리듬에 있어서 스피드는 오히려 상대적이다. 우리 축구는 무조건 빠르기만은 요구하는 경향이 아직도 농후하다. 빠른 것이 미덕이긴 하지만, 때로는 느린 것이 엇박자의 리듬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이미 압박 축구는 스피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도 이제 음악을 들어야 한다. 기본기에서 고난도의 테크닉, 전략전술을 익히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지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서 상대와는 다른 리듬을 구사하며 '코리아'의 문화적 색채가 가미된 축구를 해야 한다. 물론 악착같은 '근성'과 '체력'은 세계 축구가 한국 축구에 보내는 감탄의 정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미래를 기약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리듬의 입장에서 볼 때, 창의성은 정박자와 엇박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대위법 현상이다. 즉 빠르게 가는 층과 느리게 가는 층이 절묘하게 배합될 때, 생기는 틈, 사이, 여백을 창조하는 음악적 현상이다. 개인성의 재발견 한국 축구는 투박하긴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팀컬러를 가졌다. 한마디로 아일랜드 축구처럼 끈적끈적하고 저력이 생겼다. 유럽 축구와 마주하기도 전에 내부의 두려움 때문에 서서히 패닉 현상에 빠졌던 과거는 이제 과거의 우스개로 변해다. 두려움 없는 축구. 그만큼 콤플렉스 없이 진취적이며 패기만만하다. 하지만 그러한 팀컬러가 지나치게 팀웍이라는 구심력 속에 머무르는 것은 안될 것이다. 일단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확장하고, 그 다음에 팀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탈개인화된 팀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천수에 대한 비난이라든가 박주영에 대한 불신은 '튀는 개성'을 못 미더워하는 조직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가정법은 소용없지만, 이번 월드컵에 히딩크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더욱 더 한국 선수들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모험적이며 창의적인 축구를 권유하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능력에 따른 신인의 과감한 기용을 했을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너무 신중하고 보수적인 선수 기용이 팀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 가둬놓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지. 압박 축구에서 다시 개인성을 발견해야 한다. 이때의 개인성은 토탈사커 이전의 개인기의 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성적인 리듬을 팀에 불어넣어 풍요롭게 하고, 축구 전체를 재미있게 만드는 의미에서 개인성이다.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통해 변속하고 변주하고 게임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이천수는 이러한 개인성의 요구에 합당하게 드리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는 빠르기는 하지만, 현재로선 1대1 돌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력해결 능력이 엿보이지 않는 그에게 '수비 뒷공간을 노려라' 라는 지극히 당연한 충고는 막연하기만 할 뿐이다. 박주영은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신체 리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 케이스이다. 아직 경험치가 적다는 이유인지, 피지컬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 아르헨티나의 사비올라 같은 경우를 봐도 충분히 과정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압박 축구의 전체적인 기조는 유지하되, 빡빡하게 전개되는 승부에서는 상대의 5%를 빼앗아오는 엇박자의 리듬을 구사할 수 있는 개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대표팀의 모든 선수가 그러한 리듬을 전체 팀의 전개에 불어넣어야 하고, 공수의 전체 선율적인 리듬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음악적으로 받아들이고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닐까. 이번에 프랑스는 결국 토고 축구를 넘어서서 16강에 진출했다. 늙은 아트 사커라고 비아냥댔지만, 프랑스 축구는 후반 체력은 고갈되어도 리듬 터치가 있고 유려하고 세련된 흐름을 탈 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의 한계를 딛고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 반면, 스위스는 아직 미성숙한 팀컬러로 볼 수밖에 없다. 진정한 강자의 축구는 그 민족의 고유한 리듬을 한 개인의 신체를 통해 전체 팀의 축구 색깔에 섞어넣고, 그러한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경기를 지배하고 결국 승리를 따내는 것이다. 가나 축구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그들이 아프리카 민속춤을 연상시키는 리듬 속에서 상대를 자신들의 페이스로 몰아넣듯이 우리도 탈춤의 리듬, 사물놀이의 리듬으로 상대에게 엇박자의 낯설 충격을 안기면 어떨까. 그러면서 현재의 압박 축구를 구사한다면,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남수 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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