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모든 직무에서 손을 떼야 한다.”
제프 블라터(79) 국제축구연맹(FIFA·피파) 회장이 3일(한국시각)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올해 말과 내년 3월 사이에 구성될 것으로 보이는 새 회장 선출을 위한 임시총회까지 블라터 회장이 그대로 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 때문에 피파가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졌는데, 새로운 집행부 구성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몽준 피파 명예부회장 겸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은 3일 축구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 회장을 뽑기 위한 선거 관리는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블라터 회장은 개혁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제롬 발크 사무총장과 함께 모든 직무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터 회장은 이날 스위스 취리히 피파 본부에서 갑작스레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지금은 피파가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할 때다. 집행위원을 총회에서 뽑도록 하고, 집행위원이나 회장의 임기도 제한을 둬야 한다”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남은 기간 직접적으로 업무를 챙기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은 “피파의 부정부패로 어쩔 수 없이 사퇴하게 된 블라터 회장이 개혁을 얘기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블라터 회장이 셀프 개혁을 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주 총회에서 5선에 성공한 블라터 회장은 ‘오른팔’인 발크 사무총장이 2010 남아공월드컵 개최와 관련한 뇌물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혐의가 보도되면서 나흘 만에 사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발크 사무총장은 2008년 남아공축구협회 쪽이 피파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1000만달러를 북중미축구연맹 회장인 잭 워너의 개인 계좌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실행한 것으로 돼 있다. 발크 사무총장은 “카리브해 연안의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축구 지원을 위한 돈”이라고 변명했지만, 미국 법무부는 2004년 남아공월드컵 개최지 선정 때 도움을 주었던 워너 회장에 대한 뇌물로 보고 있다. 칼끝이 블라터 회장의 최측근에게까지 좁혀온 것이다.
정 회장은 과거 자신의 피파 집행위 참석 경험을 예로 들며 “집행위원회에서 투명성을 얘기하면 회장이 화를 냈다. 모두 블라터 회장에게 얘기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불투명성과 폐쇄주의가 부패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2018·2022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 비리 의혹에 대해 피파가 2012년 미국인 변호사 마이클 가르시아를 책임자로 조사위를 구성했지만, 블라터 회장이 지난해 나온 수백쪽의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은 것도 사례로 지적했다.
블라터 회장의 사임에는 지난 4월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법무장관으로 취임한 로레타 린치(56)의 강력한 부패 척결 의지가 작용했다. 린치 장관은 지난달 27일 스위스 사법당국과 공조해 제프리 웹 북중미축구연맹 회장, 에우헤니오 피게레도 피파 부회장 등을 포함해 7명을 체포하도록 하는 등 피파에 강경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도 블라터 회장이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자, 고위급 인물에 대한 추가 기소 가능성을 알린 뒤 발크 사무총장의 비리 혐의를 흘렸다. 린치 법무장관은 미국 국세청(IRS)도 동원해 미국에서 이뤄진 피파의 부정행위를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김창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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