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사진 한국여자축구연맹 제공
[통통 스타] 여자축구 박은선
“여기는 모세병원이에요. 힘이 없어요.”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는다. 인터넷을 뒤지고 구단에 물어서 찾아간 서울 강동구의 모세정형외과 503호실. 1m81의 장대한 박은선(29·대교)의 왼발목은 수술 뒤라 붕대로 감겨 있었고, 마취 후유증 때문인지 손목을 얼굴에 올린 채 쉬고 있다. 수술한 지 하루도 안 돼 인터뷰를 하는 것도 고역일 것 같다.
“괜찮아요?”라고 묻자, 박은선은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일어나지 말라고 하자, 간호하던 어머니한테 침대를 높이라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한 박은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뒷바라지한 어머니는 딸의 명령조 말에도 성글성글 웃는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네요. 아니 어떻게 이런 상태로 공을 찼냐고. 참을성이 대단해요.” 그러자 박은선이 “엄마는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지난 9일 열린 2015 WK리그 챔피언결정 2차전 인천 현대제철과 이천 대교의 경기. 박은선은 연장 120분 혈투 동안 대교의 중앙 수비수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팀의 승부차기 패배로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울지 않았어요?”라는 물음에 “잤어요. 아주 푹 잤어요”라고 쿨하게 답한다. 수술받은 발목은 당시 괜찮았던 것일까. 박은선은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동료들도 아픈 것 참고 다 뛰었어요”라고 했다. 병원은 박은선의 발목에서 수년간 돌아다니던 뼛조각을 제거했고, 상처 입은 인대도 손을 봤다. 오른 무릎 두 차례, 이번 왼발목까지 세번째 수술이다. 그래도 강골로 태어났기에 오뚝이처럼 버틴다.
2년간 아파도 참고 뛴 게 화근
발목 뼛조각 제거·인대 치료까지
무릎 2번 이어 세번째 수술대
“한달뒤 깁스 풀고 2~3개월 재활
내년 그라운드에 복귀해야죠” 아픈데도 뽑아준 대교팀 고마워
공격수지만 임시 수비수 출전도
“축구 너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
2019년 월드컵도 뛰고 싶지만
실력서 밀리면 스스로 그만둘 것”
박은선은 틈틈이 오른 다리를 들어 올렸다. 옆의 어머니는 “언제나 저래요.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을 때라도 항상 근육을 움직이네요”라고 설명한다. 무표정한 박은선은 “한달 뒤에 깁스 풀고 2~3개월 재활 운동 하면 그라운드에 복귀해요. 그때 펄펄 날기 위해선 지금 고통스런 것도 달게 삼켜야 한다”고 했다.
박은선은 축구 선수가 되면서 행복해졌다고 했다. 늦게 시작했지만 성장은 빨랐다. “공을 튕기는 리프팅 훈련 목표가 1000개였어요. 처음엔 남아서 혼자 했지만, 나중엔 1만개까지 했어요. 한번 하면 몇시간씩 걸리는데 나중에는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 노력으로 위례정산고 3학년 때인 2003년 미국여자월드컵에 출전했고, 올해 6월 캐나다여자월드컵까지 나갔다. 다만 지난해 러시아 프로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그리고 올해 대표팀 소집 때 뒤처지기 싫어 무리했던 탓에 왼쪽 발목이 거의 고장났다.
그럼에도 박남열 대교 감독은 올여름 박은선을 영입했고, 깊은 신뢰를 보내면서 부활의 길을 열어 놓았다. 박은선은 “아픈 선수를 뽑아준 것도 감사하고, 믿어준 것도 감사하다”고 했다.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맡긴 중앙수비 중책을 온몸을 다해 수행했는지도 모른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발목이 아파 순간적으로 회전하고 스피드를 살릴 수 없었지만 영리하게 위치를 선점하면서 막았다”고 평가했다. 우승은 못했지만 팬들은 박은선의 새로운 면모에 매료됐다. 박은선은 “수비는 어려워요. 상대 공격수 결정에 수동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공격은 선택 옵션이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라고 했다. 박남열 감독도 “선수가 없다면 수비로 세울 수 있지만, 주로 공격수로 기용해 내년엔 우승을 일구겠다”고 다짐했다.
박은선이 회복되면 대표팀에도 동력이 추가된다. 한때 방황했던 박은선은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며 2013년 말 팔뚝에 새긴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라는 영문 문신을 보여줬다. “2019년 월드컵에도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엔, “두번의 월드컵에서는 아쉬움만 남았다. 내가 좋아하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처럼 멋지게 골을 넣고 싶은 마음이 있다. 꼭 필요한 선수로 인정받으면 가겠지만, 그저 그런 선수로 뽑힌다면 내가 그만둘 것”이라고 했다. 여자축구의 ‘순수’로 통하는 박은선의 자존심이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발목 뼛조각 제거·인대 치료까지
무릎 2번 이어 세번째 수술대
“한달뒤 깁스 풀고 2~3개월 재활
내년 그라운드에 복귀해야죠” 아픈데도 뽑아준 대교팀 고마워
공격수지만 임시 수비수 출전도
“축구 너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
2019년 월드컵도 뛰고 싶지만
실력서 밀리면 스스로 그만둘 것”
17일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박은선의 왼발목과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라고 새긴 팔뚝 문신. 사진 김창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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