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은 둥글다. 지구도 둥글다. 장애인 앞에 사상이나 이념, 종교는 없다.” 신철순 곰두리축구단 회장은 축구 원로가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요즘, 필드에서 축구 영혼을 지키는 영원한 선수다. 신 회장이 22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곰두리축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금 기자
축구를 잘한다고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선수 생활이 끝나면 더 긴 삶이 있다. 인생의 승부도 축구처럼 후반전에 갈리는 것은 아닐까. 스타는 아니었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더 빛나는 별이 있다. 뻗친 직모 백발에 뿔테 안경, 차분하고 칼칼한 말씨는 얼굴의 주름과 함께 그의 이력이다. 철저히 낮추고 겸양하는 품성은 내면이다. 신철순(72) 곰두리사랑회(곰두리축구단) 회장. 축구 원로가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요즘, 그는 필드에서 축구 영혼을 지키는 영원한 선수다.
22일 서울 은평구 구립체육센터. 푹푹 찌는 한낮의 더위에 20여명의 곰두리축구단 회원과 자원봉사자가 모였다. 주말 이뤄질 예정이었던 곰두리사랑회 축구 경기가 구청 행사로 인한 운동장 대관 불발로 취소됐는데, 인터뷰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평일인 이날 긴급 소집됐다. “그거 크게 나가는 것 맞지? 근데 왜 나 같은 사람을….” 땀을 뻘뻘 흘리는 신철순 회장은 다시금 “나는 아니다”라고 한다. “아니, 맞아요. 욕심 넘치는 세상에 누구 하나쯤은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궂은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죠.” 이렇게 설득을 하자 수긍을 한다. 공짜 주식으로 100억원 이상을 챙긴 박사네, 검사네 하는 낯짝 두터운 이들이 속세에선 권력자로 대접받는다. 보수도 없이 음지에서 작은 것이나마 나누는 이들은 갈수록 숨이 막힌다. 범인들은 어디에 큰 가치를 둘 것인가.
“1인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
극과 극을 달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이날 축구장에서도 드러났다. 뇌성마비·시각·청각·지적 장애인으로 구성된 곰두리축구단은 한 달에 네 번 주말에 축구를 한다. 두 번은 은평구 구립체육센터에서, 나머지 두 번은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운동장과 숭실대에서 경기를 치른다. 꼬박꼬박 대관료를 내고 사용하는 구립체육센터의 문턱은 낮지 않다. 이날 땡볕 아래 고교 동호회원들의 경기가 있었는데, 곰두리축구단 회원들이 등장하자 관리인은 볼멘소리를 한다. 잘 알고 있는 장애인팀인데, 그것도 경기를 하고 있는 팀에 양해를 구하고 하프타임에 잠깐 사진 찍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여전한 것인지, 아니면 인심이 각박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운동장 구하느라 평생을 뛰어다니는 것 같아.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 통해서 도움도 많이 받아. 1년에 1~2번은 꿈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뛰기도 하지. 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 맥이 쭉 빠져.” 신 회장의 넋두리다. 5월 두 차례나 구 행사로 주말 축구장 대관이 취소됐을 때는 구청장실까지 쫓아가기도 했다.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유명 선수 축구 클리닉 하면 구민들이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장애인 축구 선수들은 어떡하라고. 최소한 다른 장소 알아볼 시간은 줘야지. 정말 1인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평생을 을의 입장에서 울화를 안으로 삭이면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장애인 축구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신 회장은 3년 전 한 인터뷰에서 “운명이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돌보지 않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면서도 내가 끊을 수는 없다”고 했다.
신 회장이 장애인 축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 여름이다. 정부는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할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팀을 급조해야 했고, 대한축구협회는 신철순 협회 경기위원에게 팀을 꾸려달라고 부탁했다. 지도 능력뿐 아니라 장애인을 다룰 인격까지 고려한 선택이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참가를 위해 하키, 핸드볼 등의 선수를 모아 여자축구팀을 급조할 때도 신 회장이 실무를 맡았는데 같은 맥락이다. 정 많고, 도와주려고 하고, 여리지만 옳다고 믿으면 불같이 밀고 나가는 성격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국내 장애인 스포츠 활동은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남 눈에 띄지 않게 복지관이나 집에서 틀어박혀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 회장은 전국의 복지관을 수소문해 11명(경기는 7인제)으로 팀을 꾸린 뒤 경기 일산의 홀트아동복지회에서 5개월간 합숙을 하며 지도했다. 맨땅에서 훈련했지만 10월 대회에서 한국은 6개 출전국 가운데 4위를 차지했다. 대회 뒤 끝낼 수도 있었지만 모질지 못했다. “동메달 땄으면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운 거야. 그래서 해단식 때 ‘니들 축구 하고 싶으면 다음주에 홀트에서 축구하자’고 했지. 그랬더니 다 온 거야. 다들 할 게 없잖아.” 이렇게 시작된 모임은 88 장애인올림픽 마스코트를 따 곰두리사랑회로 명명됐고, 마스코트 곰 두 마리의 2인3각처럼 신 회장과 후원자들의 힘으로 달려왔다.
건국대 후배이며 후원 행사에 단골로 나가는 최경식 해설위원은 “장애인축구팀을 이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말할 때 먹던 밥알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선수들하고 마주 앉아 얘기 들어주고, 축구 가르치고, 집에 갈 때 교통편까지 알아봐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이날도 선수들을 위해 부인과 손자, 손녀까지 나와 초코파이와 500㎖ 생수병을 날랐고, 집에 그냥 보내면 안 된다고 식당에서 제육볶음 점심을 먹인 뒤 돌려보냈다. 6년 전부터 신 회장의 손발이 돼 돕고 있는 양진석 광명시 광휘고등학교 교사(수학)는 “작은 것도 상처 입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긴다. 후원자에게 공문 한 장 보낼 때도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낸다. 중간에 한 자라도 잘못 쓰면 화이트로 지우지 않고 새로 쓴다. 그러다 보니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일하기 일쑤”라고 했다.
88 장애인올림픽 축구 4위 이끈 인연
해단식 때 “계속 축구 하고 싶냐 했더니
다음주에 다 나오더라, 할 게 없잖아”
뇌성마비 등 장애인 곰두리축구단 탄생
가족들까지 나서 ‘운명처럼’ 매달려
이회택 등과 동년배, 20년간 지도자 삶
조광래, “진정성 느껴지는 평생의 스승”
선수들에게 교양과 전술시험 치르는 등
스스로 생각하는 힘 키워주려 힘 쏟아
“개인 후원자 많이 늘어났으면” 바람
신철순 곰두리축구단 회장이 지난 22일 서울 은평구 구립체육센터 축구장에서 장애인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열정은 곰두리축구단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조광래 대구FC 대표, 서정원 수원 삼성 감독, 김상식 전북 현대 코치 등 제자나 후배들을 후원자로 끌어모으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고 운보 김기창 화백이나 고 신영복 교수, 서예가인 열암 송정희나 무궁화 그림 명장 청전 박채배, 화가 유선영과 가수 안치환 등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전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김성일 장애인체육회 회장이나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 인사까지 망라해 폭넓게 교류하는 것을 보면 열린 마음이 신 회장의 최대 장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념적으로도 열려 있다. 왼쪽에 있는 신영복 교수가 써준 ‘함께 가자 우리,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액자는 서울 은평구 녹번동 4평짜리 사무실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의 박근혜 대통령의 신문 얼굴 사진은 취임 때 기대감으로 수첩 첫 페이지에 오려 붙였다. 신 회장은 “축구공은 둥글다. 지구도 둥글다. 장애인 앞에 사상이나 이념, 종교는 없다. 여야도 없다”고 했다.
선수들에게 사설 옮겨쓰기 시켜
서울 토박이인 신 회장은 고교 입학을 하면서 축구를 시작했다. 중동고의 알아주는 선수로 동년배로는 이회택(동북고), 조중연(중동고), 이세연(한양공고) 등이 있다. 이회택 전 축구협회 부회장은 곰두리사랑회 후원회장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어, 지금은 적(?)이 아니다. “나는 수비수였고, 중동도 제법 잘했어. 그런데 동북만 만나면 회택이 때문에 안 돼. 회택이가 워낙 출중해 막을 수가 없었어.” 졸업 뒤 건국대에 들어간 신 회장은 4학년 때 주장을 맡고 농업교사 자격증도 딴 뒤 1960년대 말 거의 대표급으로 구성된 최고의 팀인 중앙정보부 소속의 양지에 입단한다. 하지만 70년 팀이 해체돼 육군대표팀으로 통합되면서 선수로는 더 이상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제대 뒤 지도자의 길을 걸은 신 회장의 첫 직장은 이천 남초등학교 축구팀 감독. “처음에 이천 남초등학교에 부임했는데, 아이들과 같이 뒹굴며 공을 찼지. 그 얼마 뒤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이천초등학교를 이겼어. 그랬더니 트럭 카퍼레이드까지 동네에서 난리가 났었지.” 1년이 안 되는 짧은 초등학교팀 경험은 이후 고교 축구 최고지도자상을 받은 신 회장에게 엄청난 자산이 됐다. 진주고 감독을 시작으로 경남공고, 창신공고, 대신고, 중앙고, 강릉농고, 경남공고까지 20년간 돌면서 배출한 선수 가운데는 조광래 대표, 박양하 전 경남 2군 감독, 김승희 코레일 감독, 김상식 코치 등이 꼽힌다. 신철순 감독이 진주고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었을 때 주장을 맡았던 조광래 대표는 “선수들을 존중하고 마음으로 대할 때 진정성을 느낀다.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평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조광래를 건대로 보내지 않고 연대로 보낸 것은 그의 뚝심을 보여준다. 학교에 사무실까지 내주며 공을 들인 건대 쪽은 신철순 감독과 의절할 정도로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철순 회장은 “신세 진 것은 신세 진 것이고, 올바른 제자는 더 잘 키워야 한다며 맞섰다”고 했다.
꼼꼼한 신 회장은 선수단 운영에도 유별난 데가 있었다. 선수들에게 학교에서 보는 시험과는 별개로 교양과 전술시험을 부과한 것은 한 예다. 1주일에 한 번 신문 사설을 옮겨 쓰도록 하거나, 숙소의 복도에 설치한 화이트보드에 써놓은 전술이론을 적어서 내도록 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 <한겨레>를 비롯해 야성이 강한 신문을 구독하는 것도 독특한 일면이다. 1997년 정몽준 회장에 반대해 개혁을 외쳤던 ‘축구를 사랑하는 축구인 모임’(축축모) 참가 때의 꼿꼿한 모습과도 연결된다. 그는 옹립했던 후보가 3표밖에 얻지 못해 패배하자 경기도 일영으로 낙향하며 깨끗하게 축구계를 떠난다. 일부 선배들이 머리 숙이고 들어가 자리 하나라도 얻으려는 모습에 큰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나 집행부는 반대파였던 신 회장에게 더 큰 신뢰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2002년을 전후해 축구협회는 매해 2000만원과 물품을 지원하는 등 곰두리사랑회의 가장 큰 후원자 노릇을 해오고 있다
장애인 선수들을 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장애 종류에 따라 심리도 달라 다루는 방법도 다르다. “뇌성마비 선수들은 몸이 불편할 뿐이지 정신은 비장애인과 똑같아. 매우 예민한 편이지. 청각장애 선수들은 억눌린 감정 때문인지 운동장에서는 가장 거칠고 활동적으로 움직이지. 그런데 자칫 오해도 잘해. 입모양만 보고 욕하는지 아닌지도 알기 때문에 선수들 앞에서는 항상 조심해야 돼.” 곰두리사랑회는 애초 뇌성마비 선수들 중심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청각이나 시각, 지적 장애인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선수들 충원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개별 복지원 입장에서는 올림픽 등 국제대회 나갈 확률이 높은 개인전 출전 선수에게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입상하면 혜택이 있으니까 성적을 낼 만한 종목에 투자를 하는 셈이야.”
그럼에도 곰두리축구단은 장애인들한테는 희망의 산실이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이듬해 나라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에는 26일간 유럽 11개국에 축구 견학을 떠났다. 2011년 하버드대학 축구팀이 한국에 왔을 때는 친선경기를 펼쳤고, 올해 10월에는 답방 형식으로 미국에 갈 꿈에 부풀어 있다. 해마다 곰두리사랑회 초청 국제축구대회, 후원자와 함께하는 곰두리축구, 탈북인이나 홈리스와 함께 벌이는 더불어 축구대회를 최소 세 번 이상은 한다. 8월에는 공군사관학교 합숙훈련과 사랑의 친구 곰두리 대회 개최 준비로 바쁘다.
시구 적어둔 수첩만 10권 넘어
재정은 늘 걱정이다. 외부의 후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만, 개인 후원자는 거의 없다. 과거 운보 쪽에서 그림을 주고자 했을 때 딱 한 점을 받았고, 그것도 후원자에게 감사의 표시로 선물했을 정도로 이재에 밝지도 못하다. 요즘엔 열암 송정희나 청전 박채배 등이 기부하는 작품을 후원자에게 전달해 마음을 얻고, 또 백방으로 뛰며 기업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사회를 통해 한 해 예산을 정하고, 최소 경비를 원칙으로 지출을 하고, 감사도 받지만 늘 빠듯하다. 한때 엘아이지(LIG)가 적극적인 후원자였지만 대표가 수감되면서, 임원들이 회사 차원에서 지원을 끊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졌다고 했다. 신 회장은 “일반 후원인들을 확대해야 하는데 쉽게 되지가 않는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신 회장은 기록의 달인이다. 곰두리축구단을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깨알같이 날짜별로 의미있는 역사를 담은 수첩만 10권이 넘는다. 수첩에는 ‘꿈이란 작은 손짓으로도 솟아오르는 태양이다’ ‘누구나 잠을 자면 꿈을 꿀 수 있다. 그러나 이룰 수는 없다’ ‘함께 가자 우리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등 우연히 마주친 시구나 시상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김창금 기자
신 회장은 기록의 달인이다. 곰두리사랑회 출범부터 깨알같이 날짜별로 의미있는 역사를 담은 수첩이 10권이 넘는다. ‘꿈이란 작은 손짓으로도 솟아오르는 태양이다’ ‘누구나 잠을 자면 꿈을 꿀 수 있다. 그러나 이룰 수는 없다’ ‘함께 가자 우리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등 우연히 마주친 시구나 시상들을 적어두었다. 새겨야 할 금언도 그의 수첩에는 가득하다. 책으로 엮어도 될 듯한 분량과 주옥같은 문장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시는 샘 레빈슨(1911~1981)의 ‘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이란다.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하게 말하십시오”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한 손은 그대 자신을 도와주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한 손입니다”라고 끝난다. 인생의 후반부 장애인을 향해 뛴 신철순 회장은 가장 따듯한 손을 갖고 있다.
▶ 김창금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란 말이 있다. 그런데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학창시절도 아닌 군대였으니, 여자들은 이런 마음을 알까? <한겨레> 스포츠 기자로 1999년 이후 줄곧 축구기사를 써오면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마음껏 축구 할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꿈을 간직해왔다. 스포츠 경제와 스포츠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김양희의 야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