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계속 비가 내린 1일 전주월드컵경기장. 팬들이 속속 관중석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전북 현대와 대구FC의 K리그1 마지막 경기. 무승부만 거둬도 챔피언에 오르는 상황이었지만 전북 팬들의 표정은 마냥 밝지 못했다. 이날 경기가 ‘전설’ 이동국(41)의 은퇴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동국은 한국 프로축구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고교 때부터 괜찮은 모습을 보인 이동국은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다. 포항에서 초중고를 나온 그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 잡았다. 축구 실력에 준수한 외모로 스타성까지 겸비한 대형 신인 등장에 프로축구 전체가 들썩였다. 당시 그가 누리집을 개설했다는 소식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20살 이동국의 모습. 이동국은 1998년 아시아 19살 이하(U-19) 선수권, 2000년 아시안컵, 2011년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이동국은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안정환과 함께 프로축구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데뷔 시즌에 신인왕을 차지했는데, 당시 두 선수의 신인왕 경쟁이 연일 화제를 모았다. 프로축구도 덩달아 큰 인기를 끌어, 당시 누리꾼 선호도에서 축구(55%)가 야구(45%)를 제쳤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동국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특히 월드컵은 그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깜짝 데뷔한 그는 19살52일로 우리나라 최연소 월드컵 출전 기록을 세웠다. 한국이 0-5 대패를 당하던 와중 호쾌한 중거리슛을 날리며 ‘이동국’ 이름 석 자를 국민에게 알리기도 했다. 당시 한 외국 축구잡지는 프랑스월드컵을 결산하며 “이동국 같은 선수가 성장한다면 한국 축구도 미래가 있다”라고 적기도 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 출전한 이동국이 슈팅을 시도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불행은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동국의 국가대표 선발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이 부임하면서 ‘무한경쟁’이 시작됐고, 이동국은 대표팀 최종명단에서 탈락했다. 온 국민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던 그때 이동국은 술로 날을 지새울 정도로 괴로워했다. 절치부심 도전했던 2006년 독일월드컵 때는 대회 직전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그야말로 ‘잔혹사’였다.
이동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의 큰 고빗길마다 성실함으로 맞섰다. 해외무대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성실함이 빛을 본 건 2009년. 그는 최강희 전 감독의 부름을 받아 전북에 합류했다. 이동국은 그해 K리그1 득점왕에 오르며 팀과 자신의 첫 리그 우승을 일궜다. 중하위권 팀이었던 전북은 이동국 합류 뒤 리그 우승 8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를 차지하며 아시아 대표 명문 구단으로 거듭났다. 전북은 그의 등 번호 20을 영구결번 하기로 했다.
신세대 스타였던 그는 이제 ‘프로 장인’이 됐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K리그 통산 기록은 548경기 출전 동안 228골 77도움. K리그 최우수선수도 4차례(2009·2011·2014·2015년) 수상했다.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이다. 548경기 동안 단 1번만 퇴장을 당한 기록에서는 그의 페어플레이 정신도 엿볼 수 있다.
1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1 파이널 A 대구FC와 경기에 출전한 이동국의 뒷모습.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동국은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출장해 90분 내내 뛰었다. 전북은 ‘포스트 이동국’ 조규성(22)의 멀티골 활약으로 대구를 2-0으로 꺾고 K리그 최초 리그 4연패 금자탑을 쌓았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1만251명의 홈 관중 앞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이동국은 지도자 교육을 받으며 제2의 축구 인생에 나선다.
전주/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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