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택씨
중국 ‘축구 한류’ 불러온 최은택씨 추모열기
1997년 약체 ‘백두산팀’ 맡아 4강 돌풍
“몸 아니 정신력 중요” 강조…희망 불러
누리꾼들 ‘존경스럽다’ 조문 수천개 올려 “최 교수님 잘 가세요.” 지난 5일 작고한 최은택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추모하는 중국인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신랑과 소후 등 중국 인터넷 포털에선 고인을 기억하는 축구팬들의 조문 릴레이가 벌어지고 있다. 중국 신문들도 그의 사망 소식을 체육면 머릿기사로 전하며, 그가 중국 축구계에 끼친 영향을 되짚고 있다. 중국인들은 한양대 교수를 지낸 고인을 생전에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중국 축구팬들은 고인을 ‘연변의 기적을 일으킨 정신적 지도자’로 기억한다. 고인은 1997년 중국 프로축구 연변 백두산팀 감독을 맡아 누구도 예상못한 돌풍을 일으켰다. 늘 약체로 꼽히던 연변팀을 조련해 당당히 4강에 올린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그 해 최고발전상을 타는 영예를 안았고, ‘축구 한류’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그는 훗날 그 당시를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이라고 회고하곤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중국 인터넷엔 수천개의 조문이 올라오고 있다. 한 누리꾼은 “연변팀의 기적을 보고 비로소 중국 축구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고인을 애도했다. 다른 누리꾼은 이에 “그는 중국 축구를 계몽한 지도자”라며 “그가 중국 축구계에 끼친 공헌을 기억해야 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누리꾼들의 조문에는 ‘존경스런 감독’ ‘좋은 사람’이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그가 감독으로 일했던 연변팀은 더욱 큰 슬픔에 잠겼다. 연변팀은 유족들에게 곧바로 조전을 띄우고 화환을 보냈다. 까오쥔 연변팀 감독은 <신징바오>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많은 선수들이 눈물을 흘렸다”며 “고인은 우리에겐 가족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고 싶지만, 한국행 비자가 나오는 데 10일 정도나 걸려 포기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인은 중국 축구에 정신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국 축구의 이른바 ‘공한증’도 ‘정신력의 부재’로 이해했다. 그는 생전에 한 중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축구란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라며 “중국 축구의 가장 큰 약점은 정신력의 결여”라고 말했다. 국제무대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중국 축구에 답답해하던 축구팬들이 그의 이런 지적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는 1998년 성적 부진과 건강 악화로 연변팀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축구 한류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김정남, 박종환, 차범근, 이장수 감독이 중국 프로축구에 속속 진출했다. <신징바오>는 고인을 ‘축구 한류의 스승’이라고 애도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몸 아니 정신력 중요” 강조…희망 불러
누리꾼들 ‘존경스럽다’ 조문 수천개 올려 “최 교수님 잘 가세요.” 지난 5일 작고한 최은택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추모하는 중국인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신랑과 소후 등 중국 인터넷 포털에선 고인을 기억하는 축구팬들의 조문 릴레이가 벌어지고 있다. 중국 신문들도 그의 사망 소식을 체육면 머릿기사로 전하며, 그가 중국 축구계에 끼친 영향을 되짚고 있다. 중국인들은 한양대 교수를 지낸 고인을 생전에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중국 축구팬들은 고인을 ‘연변의 기적을 일으킨 정신적 지도자’로 기억한다. 고인은 1997년 중국 프로축구 연변 백두산팀 감독을 맡아 누구도 예상못한 돌풍을 일으켰다. 늘 약체로 꼽히던 연변팀을 조련해 당당히 4강에 올린 것이다. 그는 이 공로로 그 해 최고발전상을 타는 영예를 안았고, ‘축구 한류’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그는 훗날 그 당시를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이라고 회고하곤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중국 인터넷엔 수천개의 조문이 올라오고 있다. 한 누리꾼은 “연변팀의 기적을 보고 비로소 중국 축구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고인을 애도했다. 다른 누리꾼은 이에 “그는 중국 축구를 계몽한 지도자”라며 “그가 중국 축구계에 끼친 공헌을 기억해야 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누리꾼들의 조문에는 ‘존경스런 감독’ ‘좋은 사람’이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그가 감독으로 일했던 연변팀은 더욱 큰 슬픔에 잠겼다. 연변팀은 유족들에게 곧바로 조전을 띄우고 화환을 보냈다. 까오쥔 연변팀 감독은 <신징바오>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많은 선수들이 눈물을 흘렸다”며 “고인은 우리에겐 가족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고 싶지만, 한국행 비자가 나오는 데 10일 정도나 걸려 포기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인은 중국 축구에 정신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국 축구의 이른바 ‘공한증’도 ‘정신력의 부재’로 이해했다. 그는 생전에 한 중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축구란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라며 “중국 축구의 가장 큰 약점은 정신력의 결여”라고 말했다. 국제무대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중국 축구에 답답해하던 축구팬들이 그의 이런 지적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는 1998년 성적 부진과 건강 악화로 연변팀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축구 한류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김정남, 박종환, 차범근, 이장수 감독이 중국 프로축구에 속속 진출했다. <신징바오>는 고인을 ‘축구 한류의 스승’이라고 애도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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