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남녀 농구선수로 최근 나란히 은퇴한 이창수(오른쪽) 전주원이 지난 3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프로농구 최고령 은퇴한 전주원·이창수
[전주원] 초등 5학년때 공 잡아
리그 5연패 ‘불세출의 가드’…엄마 역할 제대로 할터 [이창수] 중 3때 길거리 캐스팅
42살, 뛸때마다 신기록…후배들 잘 가르칠 것 커피숍은 아니었다. 한겨레신문사 옥상의 오붓한 벤치. 그런데 우리 나이 마흔세살 아저씨와 마흔살 아줌마의 만남이 느끼하지 않다. 순수와 꾸준함 두바퀴로 달려온 연륜의 힘 때문인지 봄빛마저 더 화사하다. 한국 농구 남녀 최고령 선수로 뛰다가 지난달 나란히 은퇴한 1969년생 이창수와 1972년생 전주원 이야기다. 척 봐도 통하는 듯 3일 둘의 ‘수다’는 길게 이어졌다.
■ “오빠” 붙임성에, 모른척 “허, 허” 싹싹한 전주원(신한은행 코치)은 “오빠”라고 먼저 불렀고, 엘지(LG)에서 은퇴한 이창수는 “허허, 전 코치”라며 예우했다. 멀리서만 봐왔던 둘은 존경의 마음이 넘쳤다. 전주원은 남자농구의 거친 몸싸움 세계에서 마흔이 넘게 뛴 점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는 “용병과의 자리 다툼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투혼을 느꼈다”고 했다. 이창수도 20년간 국내 여자농구를 평정한 불세출의 가드 전주원을 눈여겨봐왔던 터. 그는 “남자팀 가드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데다 드리블과 민첩성, 리딩 능력도 남자 선수들에게 전혀 뒤질 게 없어 보였다. 열정이 놀랍다”고 맞장구를 쳤다.
■ 한우물만 판 가드와 센터 선수들한테는 화약처럼 불붙는 전환점이 중요하다. 선일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전주원은 땅꼬마였다. 당시는 키 순서대로 4번부터 15번까지 달던 시절. 그는 12명 중 11번째로 작아서 등번호 5번을 달았다. 하지만 늘 1등인 승부욕은 키마저 훌쩍 자라게 만들었다. 그는 “농구부에 들고 난 뒤 키가 무럭무럭 자라서 키 큰 애들을 모조리 제쳤다. 그때부터 내 세상이 됐다”고 했다.
이창수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선수가 됐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친구들과 군산 시내에 나갔다가 당시 군산고 최홍묵 코치의 눈에 띄었다. 팔이 길었던 이창수는 “그 뒤로 은퇴할 때까지 센터였다”고 했다. 1996년 몸에 이상이 생겨 은퇴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계약을 1년만 연장하는데 오기가 생겼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시즌을 준비했고 이듬해 챔피언에 올랐다”고 했다. 지난 시즌 창원 엘지의 강을준 감독이 “참 농구선수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이창수와 계약한다”라고 한 말은 명언이다. ■ 은퇴 땐 오랜 포도주같이 선수 생명이 짧은 한국 프로농구 문화에서 둘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은퇴할 때 소속팀 막내와 18년 차이가 났던 이창수나 20년 간격이 있었던 전주원은 새로운 인물형이다. 이창수는 “주위에서 신인들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 내 나이를 실감했다”며 웃었다. 전주원도 지난해 신입 선수들이 “언니 안녕하세요” 하더니 하루만에 갑자기 “선생님”으로 부를 땐 여러 생각이 겹쳤다고 했다. 선일여고 11년 후배인 하은주는 “주원샘(주원 선생님)”이라고도 한다. 때로 “낄 곳이 없더라”(이창수) “우리는 외톨이”(전주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배들이 “형”이나 “언니”라며 살갑게 다가올 땐 반갑기도 했다. 화려한 은퇴는 아니더라도, 오래된 포도주처럼 기억됐으면 하는 게 둘의 소박한 바람이다. ■ 새로움이 시작되는 5월 전주원의 스마트폰 ‘카카오톡’ 문패는 “학부모로 산다는 것’이다. 전주원이 “아이 뒤치다꺼리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고 하자, 이창수도 “애들이 더 바쁘다”고 했다. 이창수는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소속팀 어린이날 행사가 많아서 정작 원석(아들)이와 놀아주지 못했다”고 했다. 은퇴 후 처음 맞는 비시즌의 기분이 묘하지만 가족한테 볼 면목은 생겼다. 그러나 할 일은 많다. 전주원은 신한은행 코치로 돌아갔고, 이창수는 모교인 경희대에서 당분간 후배들을 위한 시간강사 노릇을 한다. 짧은 만남에도 의기투합한 둘은, “안산(신한은행 숙소)에 놀러오세요”(전주원) “한번 보러 가야겠네”(이창수)라며 오누이처럼 화답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리그 5연패 ‘불세출의 가드’…엄마 역할 제대로 할터 [이창수] 중 3때 길거리 캐스팅
42살, 뛸때마다 신기록…후배들 잘 가르칠 것 커피숍은 아니었다. 한겨레신문사 옥상의 오붓한 벤치. 그런데 우리 나이 마흔세살 아저씨와 마흔살 아줌마의 만남이 느끼하지 않다. 순수와 꾸준함 두바퀴로 달려온 연륜의 힘 때문인지 봄빛마저 더 화사하다. 한국 농구 남녀 최고령 선수로 뛰다가 지난달 나란히 은퇴한 1969년생 이창수와 1972년생 전주원 이야기다. 척 봐도 통하는 듯 3일 둘의 ‘수다’는 길게 이어졌다.
이창수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선수가 됐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친구들과 군산 시내에 나갔다가 당시 군산고 최홍묵 코치의 눈에 띄었다. 팔이 길었던 이창수는 “그 뒤로 은퇴할 때까지 센터였다”고 했다. 1996년 몸에 이상이 생겨 은퇴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계약을 1년만 연장하는데 오기가 생겼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시즌을 준비했고 이듬해 챔피언에 올랐다”고 했다. 지난 시즌 창원 엘지의 강을준 감독이 “참 농구선수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이창수와 계약한다”라고 한 말은 명언이다. ■ 은퇴 땐 오랜 포도주같이 선수 생명이 짧은 한국 프로농구 문화에서 둘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은퇴할 때 소속팀 막내와 18년 차이가 났던 이창수나 20년 간격이 있었던 전주원은 새로운 인물형이다. 이창수는 “주위에서 신인들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 내 나이를 실감했다”며 웃었다. 전주원도 지난해 신입 선수들이 “언니 안녕하세요” 하더니 하루만에 갑자기 “선생님”으로 부를 땐 여러 생각이 겹쳤다고 했다. 선일여고 11년 후배인 하은주는 “주원샘(주원 선생님)”이라고도 한다. 때로 “낄 곳이 없더라”(이창수) “우리는 외톨이”(전주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배들이 “형”이나 “언니”라며 살갑게 다가올 땐 반갑기도 했다. 화려한 은퇴는 아니더라도, 오래된 포도주처럼 기억됐으면 하는 게 둘의 소박한 바람이다. ■ 새로움이 시작되는 5월 전주원의 스마트폰 ‘카카오톡’ 문패는 “학부모로 산다는 것’이다. 전주원이 “아이 뒤치다꺼리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고 하자, 이창수도 “애들이 더 바쁘다”고 했다. 이창수는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소속팀 어린이날 행사가 많아서 정작 원석(아들)이와 놀아주지 못했다”고 했다. 은퇴 후 처음 맞는 비시즌의 기분이 묘하지만 가족한테 볼 면목은 생겼다. 그러나 할 일은 많다. 전주원은 신한은행 코치로 돌아갔고, 이창수는 모교인 경희대에서 당분간 후배들을 위한 시간강사 노릇을 한다. 짧은 만남에도 의기투합한 둘은, “안산(신한은행 숙소)에 놀러오세요”(전주원) “한번 보러 가야겠네”(이창수)라며 오누이처럼 화답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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