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춘이 28일(현지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13 국제유도연맹 세계대회 출전을 앞두고 테이핑을 하고 있다. /남지은 기자
세계유도 첫판서 일본 강자 만나
긴장한 탓 지도 4개 ‘반칙패’ 탈락
긴장한 탓 지도 4개 ‘반칙패’ 탈락
국제유도연맹 세계대회를 앞둔 24일(현지시각) 밤 9시, 왕기춘은 숙소 로비의 소파에 파묻혀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시차 적응 때문에 밤 10시 전엔 자면 안 돼 잠을 깨러 나왔다”고 했다.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니 “체중 감량중”이라고 짧게 말하곤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더이상 말을 붙이지 말아달라는 듯 이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틀간 물만 마시며 힘든 훈련까지 소화하는 막바지 체중감량에 선수들은 “죽고 싶은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 6~7㎏ 남짓 빼야 하는 왕기춘은 이맘 때 가장 예민하다. 쉽게 다가가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한다. 대회만 앞두면 말이 없어지는 매트 위 승부사에 상대를 불안하게 하는 포커페이스다. 발과 팔을 휘감은 테이핑은 육체의 노력을 말해준다.
그런 그가 런던올림픽에 이어 큰 규모의 대회에서 또 불운을 맛봤다. 2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13 국제유도연맹 세계대회 73㎏ 이하급에서 왕기춘은 1회전을 부전승으로 올라가 만난 일본의 오노 쇼헤이(랭킹 17위)에 경기 시작 2분53초 만에 지도 4개를 받고 반칙패로 64강에서 탈락했다. 지도 3개는 위장 공격으로, 1개는 공격을 해야 할 상황에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았다. 왕기춘은 지난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아시아유도대회에서 오노를 누르기 한판으로 제압했지만, 이번엔 승기를 빼앗겼다.
사실상 결승전 같은 2회전이었다. 대진의 운도 없어 시작부터 우승 후보로 꼽히는 두 사람이 맞붙었다. 이긴 한 사람은 결국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진 사람은 2회전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조인철 남자 대표팀 감독은 25일 대진 추첨 뒤 “어차피 만나야 할 상대지만, 너무 일찍 만난 게 아쉽다”고 말했다.
왕기춘이 국가대표가 된 이후 첫판에서 탈락한 것도, 지도 4개로 반칙패를 당한 것도 처음이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왕의 머리와 심장을 흔든 걸까. 경기를 앞두고 왕기춘은 의외로 긴장한 듯 얼굴이 상기됐다. 연습 대련에서도 몸이 완벽하게 풀어지지 않은 듯 경직돼 보였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이후 부진하다 1년 만에 나선 7월 국제대회(카잔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며 이번 대회 활약에 관심이 집중됐다. 대한유도협회 관계자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과 첫 대결에서 오노와 맞붙게 된 것이 생각보다 부담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앞서 김원진이 동메달, 조준호가 32강에서 탈락한 것에 선배로서 책임감도 느낀 듯하다.
“이미 지나간 대회 생각하면 뭐 하나. 다음 대회를 준비하면 된다”며 툭툭 털고 일어서는 조준호와 달리 왕기춘은 패배의 아픔이 오래간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면 왕기춘이 아니다. 경기 뒤 평소 존경한다는 이원희 여자 대표팀 코치의 따끔한 지적을 듣고 선 그의 어깨는 축 처졌지만, 눈빛만큼은 서서히 매서워졌다. “널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그를 보라. 너가 그렇게 달려들었어야 한다”는 이 코치의 말에 내내 매트를 바라보던 왕기춘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한다. 대표팀 관계자는 “그의 승부욕이라면 지금의 불운을 딛고 아시안게임, 올림픽에서 더 좋은 기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신뢰를 보냈다.
최소 금메달 1개를 노리는 남자 대표팀은 조준호에 이어 왕기춘이 32강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남자 81㎏ 이하급의 홍석웅과 90㎏ 이하급의 곽동한, 100㎏ 이상급의 조구함 등 전체급이 메달권이라 아직 기회는 있다.
여자 57㎏ 이하급에서는 김잔디(랭킹 12위)가 1회전을 부전승으로 올라간 뒤 2회전(32강)에서 만난 네덜란드의 카리아 그롤(랭킹 60위)에 발뒤축들기로 한판패를 당했다.
리우데자네이루/글·사진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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