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을 2005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챔피언으로 이끈 이영주 감독이 20일 〈한겨레〉를 찾아 포즈를 취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우승컵 안에 고인건 아픈 눈물 한바가지
지난 14일 춘천 호반체육관 선수대기실. 우리은행과의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을 앞둔 신한은행 선수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그 때 요란한 방귀 소리가 ‘뿌~웅’하고 적막을 깼다. 이영주 감독이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엉덩이에 힘을 준 것이다. 선수들은 박장대소했다.
모텔 전전하며 훈련 산전수전 딛고 일어나
선수들 긴장 풀어주려 ‘뿌웅’ 방귀로 격려도 신한은행을 겨울리그 꼴찌에서 여름리그 챔피언으로 이끈 이영주(40) 감독은 이번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코트에서 맘껏 즐기고 나오라”는 말을 자주했다. 전주원을 빼곤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한은행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이번 대결에서 여자프로농구 사상 처음으로 3번을 내리 이겨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신한은행의 힘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영주 감독은 “우리는 눈물젖은 빵을 먹어봤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이겨낸 그이기에 가능한 대답이다. 1989년 ‘농구 명가’ 현대에 입단해 ‘민완 가드’로 이름을 날리며 가슴에 태극마크까지 달았던 그에게 97년 첫 시련이 닥쳤다. 이상민을 영입한 구단은 그에게 “97시즌이 끝날 때까지 4개월만 계약하자”는 시한부 선고를 내렸고, 그는 쓸쓸히 코트를 떠났다. 97년 5월 단대부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지도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2월 용인대로부터 감독직 러브콜을 받았다. 그런데 팀이 한달 만에 해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2년 동안 야인생활을 하면서 98~99시즌에는 방송 해설위원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때 프로농구 기아(현 모비스)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박수교 감독이 선수 복귀를 제의했다. 나이 서른셋에 밤 늦게까지 농구공과 씨름하며 몸을 만들었고, 마침내 2년6개월 만에 다시 코트에 섰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고, 두 시즌만에 ‘구단에 짐이 되기 싫어’ 선수생활을 접었다. 다시 실업자가 되려는 순간 이번에는 여자프로농구 현대에서 코치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모기업의 경영악화로 농구단은 말라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정덕화 감독은 남자프로농구 에스비에스로 떠났고, 후임 박종천 감독도 2002년 여름리그 우승에도 불구하고 구단 프런트와의 마찰로 3개월 만에 팀을 떠났다. 코치도 없이 감독대행으로 선수단을 혼자 이끌면서 컨테이너에 짐을 맡긴 채 모텔을 전전하며 훈련했다. 다른 구단에서 감독직 제의도 있었지만 자신만 쳐다보는 선수들을 버릴 수 없었다. 절망의 순간, 신한은행이 현대 농구단을 인수했다. 이영주 감독은 “신한은행 인수 이후 하루하루가 감사했다”고 말했다. 팀 정비에 나선 그는 ‘튀는’ 김영옥을 과감히 트레이드하고, 진미정 선수진 박선영 강영숙 등 만년 ‘식스맨’들을 조련했다.
하지만 첫 대회 겨울리그 성적은 꼴찌. 간판스타를 내보낸 결과라는 비아냥이 따랐다. 8승12패 중 5점차 이내 패배가 7번이나 됐다. 팀을 이끌어 줄 존재가 절실할 때 전주원 코치가 코트로 돌아왔다. 전주원의 부활은 식스맨들의 눈을 뜨게 했고, ‘이영주 농구’에 화룡정점이 됐다. 행운은 계속됐다. 여름리그 기자단 투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박찬숙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코치로 발탁됐다. 그리고 마침내 챔피언 등극. 하지만 그는 여전히 겸손하다. “선수들이 잘 해줬을 뿐 내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선수들 긴장 풀어주려 ‘뿌웅’ 방귀로 격려도 신한은행을 겨울리그 꼴찌에서 여름리그 챔피언으로 이끈 이영주(40) 감독은 이번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코트에서 맘껏 즐기고 나오라”는 말을 자주했다. 전주원을 빼곤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한은행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이번 대결에서 여자프로농구 사상 처음으로 3번을 내리 이겨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신한은행의 힘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영주 감독은 “우리는 눈물젖은 빵을 먹어봤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이겨낸 그이기에 가능한 대답이다. 1989년 ‘농구 명가’ 현대에 입단해 ‘민완 가드’로 이름을 날리며 가슴에 태극마크까지 달았던 그에게 97년 첫 시련이 닥쳤다. 이상민을 영입한 구단은 그에게 “97시즌이 끝날 때까지 4개월만 계약하자”는 시한부 선고를 내렸고, 그는 쓸쓸히 코트를 떠났다. 97년 5월 단대부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지도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2월 용인대로부터 감독직 러브콜을 받았다. 그런데 팀이 한달 만에 해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2년 동안 야인생활을 하면서 98~99시즌에는 방송 해설위원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때 프로농구 기아(현 모비스)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박수교 감독이 선수 복귀를 제의했다. 나이 서른셋에 밤 늦게까지 농구공과 씨름하며 몸을 만들었고, 마침내 2년6개월 만에 다시 코트에 섰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고, 두 시즌만에 ‘구단에 짐이 되기 싫어’ 선수생활을 접었다. 다시 실업자가 되려는 순간 이번에는 여자프로농구 현대에서 코치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모기업의 경영악화로 농구단은 말라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정덕화 감독은 남자프로농구 에스비에스로 떠났고, 후임 박종천 감독도 2002년 여름리그 우승에도 불구하고 구단 프런트와의 마찰로 3개월 만에 팀을 떠났다. 코치도 없이 감독대행으로 선수단을 혼자 이끌면서 컨테이너에 짐을 맡긴 채 모텔을 전전하며 훈련했다. 다른 구단에서 감독직 제의도 있었지만 자신만 쳐다보는 선수들을 버릴 수 없었다. 절망의 순간, 신한은행이 현대 농구단을 인수했다. 이영주 감독은 “신한은행 인수 이후 하루하루가 감사했다”고 말했다. 팀 정비에 나선 그는 ‘튀는’ 김영옥을 과감히 트레이드하고, 진미정 선수진 박선영 강영숙 등 만년 ‘식스맨’들을 조련했다.
하지만 첫 대회 겨울리그 성적은 꼴찌. 간판스타를 내보낸 결과라는 비아냥이 따랐다. 8승12패 중 5점차 이내 패배가 7번이나 됐다. 팀을 이끌어 줄 존재가 절실할 때 전주원 코치가 코트로 돌아왔다. 전주원의 부활은 식스맨들의 눈을 뜨게 했고, ‘이영주 농구’에 화룡정점이 됐다. 행운은 계속됐다. 여름리그 기자단 투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박찬숙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코치로 발탁됐다. 그리고 마침내 챔피언 등극. 하지만 그는 여전히 겸손하다. “선수들이 잘 해줬을 뿐 내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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