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역도 스타 레자자데 호세인
[기고]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이창훈, 58년 도쿄서 마라톤 우승
양전광, 중국 맞선 대만의 자존심
이란 역도 호세인, 극미 대리만족
이창훈, 58년 도쿄서 마라톤 우승
양전광, 중국 맞선 대만의 자존심
이란 역도 호세인, 극미 대리만족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은 해방 이후 불과 13년 만에 일본의 심장에서 벌어진 대회였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의 ‘극일’ 의지가 강했다. 남자 마라톤 이창훈은 2시간32분55초의 기록으로 마라톤 최강국 일본 선수들을 모두 꺾고 금메달을 딴 뒤 “경기를 하면서 한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큰소리쳤다. 이창훈의 금메달은 온갖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재일동포와 6·25전쟁 후 생활고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
이란 역도 스타 레자자데 호세인(위 사진)은 미국의 오랜 경제제재로 고통받고 있는 이란 국민들에게 ‘극미’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 ‘인간 크레인’이라 불리는 호세인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남자역도 최중량급(+105㎏ 이상급)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냈고 세계선수권을 무려 4연패했다.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도 압도적인 괴력으로 금메달을 차지해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 이어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이란의 역도 임원들은 “저 정도면 미국 대륙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대만의 육상 스타 양촨광(양전광)은 스포츠 강국인 중국의 그늘에 가린 대만의 자존심을 세웠다. 그는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10종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양촨광은 ‘아시아의 철인’, ‘건국 이후 최고의 스포츠 영웅’으로 불렸다. 양촨광이 2007년 4월24일 74살을 일기로 숨졌을 때 대만은 마치 국상을 당한 것처럼 온 국민이 슬퍼했다. 대만은 아시안게임에서 큰 서러움을 당하기도 했다. 중국(당시 중공)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축출’을 요구했고, 결국 대만은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인도의 육상 영웅 P.T. 우샤는 4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따내며 다관왕에 올랐다. 우샤는 단거리(100m, 200m) 선수가 중거리(400m), 허들(400m), 1600m 계주까지 석권하는 믿기 어려운 업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서는 ‘우샤 붐’이 일어나 우샤 베이커리, 우샤 상점이 우후죽순 생기는 것은 물론 뉴델리 체육관 앞은 우샤의 거리로 이름지어졌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때는 카타르가 개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라톤 강국 케냐 출신의 무바라크 하산 샤미를 귀화시킨 일도 있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의 상징 종목인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개최국으로서의 체면이 설 것 같았다. 카타르 체육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중국, 일본, 한국 등에 밀려 많은 메달을 따지 못하겠지만, 남자마라톤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큰소리쳤다. 무바라크 하산 샤미는 기대한 대로 금메달을 차지해 카타르의 스포츠 영웅이 됐다.
무로후시 시게노부-고지 부자는 스포츠 강국 일본 안에서도 특별한 국민적 영웅으로 꼽힌다. 아버지 무로후시 시게노부는 1970년부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까지 남자 해머던지기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아시아를 주름잡고도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시게노부는 유럽주니어선수권대회 여자 창던지기 우승자 출신 세라피나 모리츠(루마니아)와 국제결혼했다.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고지(아래)는 1998 방콕 아시안게임과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 해머던지기 2연패로 전례없는 ‘아버지-아들 아시안게임 7개 금메달’ 기록을 달성했다. 고지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 해머던지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아버지의 오랜 숙원을 풀어줬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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