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부대 전출, 아이스하키는 없다.”
최전방 생활은 상관 없지만 하키 스틱을 놓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이대로 죽으란 말인가? 근육통 마사지 유혹으로 합숙소인 호텔을 벗어난 대가는 너무 컸다. 국군 상무 부대는 잔여 복무기간 7개월을 최전방 3사단에서 채우도록 했다. 스케이팅은 물론이고 스틱을 잡을 수도 없다. 일주일만 빙판 훈련을 멈춰도 감을 잃게 되는 아이스하키 선수한테는 사형선고다. 그것이 2014년 8월의 군령이었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주전 수비수 이돈구(27·안양 한라)는 불굴의 사나이다. 상무에서 정점으로 치닫다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부활해 2018 평창올림픽의 한국 팀 간판 수비수를 예약했다. 1m80, 90㎏의 탄탄한 체구에 슈팅능력, 스피드, 시야, 경기를 읽는 눈을 갖췄다. 한라 관계자는 “힘을 바탕으로 하는 수비수로 국내 선수 가운데서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했다. 아이스하키는 두 명이 수비를 보고 최전방의 센터와 양쪽의 윙이 공격을 맡는다. 그러나 이돈구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파이터다. 그가 중거리에서 터뜨리는 강력한 슬랩샷은 국내 최강이다. 이돈구는 “유럽이나 북미의 체격 큰 선수들과 맞부닥칠 때 더 짜릿하다. 체격에서는 밀리지만 정면 충돌하면 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올 시즌 한·중·일·러 아이스하키 아시아리그에 2년 만에 복귀한 이돈구는 개막전 2골을 비롯해 27일 현재 17경기에서 3골·9도움으로 한라의 2위를 견인하고 있다. 다음달 초 리그 휴지기에는 폴란드에서 열리는 4개국(한국, 폴란드,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친선대회에 출전한다. 백지선 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은 이돈구를 믿는다. 지난 3월 세계대회(디비전1 B그룹) 때도 무릎 부상을 당했던 이돈구를 데리고 갔다. 결국 그는 네덜란드전 2골 등 결정적 고비에서 수훈을 올려 한국의 우승과 디비전1 A그룹으로의 격상을 거들었다.
이돈구의 부활은 불같은 의지와 백지선 감독의 합작품이다. 스틱을 놓고 삽자루를 쥔 그는 휴식시간만 되면 백골부대 23연대 2대대의 체력 단련장에서 역기를 들었다. 영하 15도가 기본인 겨울엔 근육을 다칠까봐 조심스러웠지만, 일과 뒤에는 연방장 달리기를 빼먹지 않았다. 외박·외출·휴가를 나가지 않는 대신 일체의 휴가를 몰아 막판 15일 동안 아이스하키 개인 훈련에 사용했다. 이런 정성은 올해 3월 제대 뒤 열린 대표팀 선발 캠프에서 백지선 감독의 눈에도 들어왔다. 백 감독은 7개월 공백 뒤 캠프에서 뛰다가 무리해 오른쪽 무릎 안쪽 인대를 다친 이돈구를 끝까지 챙겼다. 이돈구는 “다친 선수를 빼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를 믿어주셨다. 더 열심히 뛸 힘이 생겼다”고 했다.
이돈구는 상무 소속이던 2013~2014 시즌 아시아리그에서 최우수 수비상을 받았다. 4개국 8개팀 감독과 프런트가 주는 상으로 국내 선수로는 이돈구가 첫 수상자다. 불꽃을 더 사르기 위해 가장 열심히 준비했던 2014~2015 시즌이 어이없게 통째로 날아가는 고통도 겪었다. “공백기 동안 아이스하키를 못하면 영영 끝날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 내가 챙겨야 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괴로웠다.” 하지만 아픈 과거는 보약이 됐다.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이 큰 재앙을 불러온 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작은 것을 조심하려고 한다.” 제2의 비상을 꿈꾸는 등번호 61번 이돈구의 눈빛이 매섭다. 안양/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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