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3일(현지시간)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그의 대변인 밥 거닐은 이날 성명을 통해 “32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은 끝에 알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알리(오른쪽)가 라이벌인 조 프레이저와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스포츠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권력은 만만한 스포츠를 요모조모 잘 활용합니다. 한국사회에서 프로야구가 등장한 배경은 한 예입니다. 대중의 여가에 대한 욕구도 있었을 테지만, 1980년대 초반 대중들이 민주화나 독재 등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주길 바랐던 권력의 기획도 작용했습니다. 지금도 스포츠는 시시때때로 권력의 이용물이 됩니다. 스포츠 스타들은 대중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기 때문에 이들을 표적으로 이슈를 만들기가 좋습니다. 당하는 스포츠 스타들 많습니다.
그런데 거대 권력, 그것도 세계제국인 미국과 맞장뜬 20세기의 거인이 있습니다. 바로 현지시각 3일 74살로 타계한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캔터키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딴 뒤 프로로 전향합니다. 흑백차별로 백인 식당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알리는 분노의 주먹을 더 다듬습니다. 1964년 헤비급챔피언에 올라서는 미국 주류사회에 대한 반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19세기 노예제철폐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캐시어스 마르셀러스 클레이를 딴 자신의 이름도 버립니다.
1966년 베트남전 징집 거부는 알리의 저항정신을 보여줍니다. 이제 막 권투의 전성기에 접어든 24살의 청년은 어마어마한 돈, 명성, 인기를 초연하게 버립니다. 당시 반전 열기가 그리 높지 않았던 미국사회를 향해 “베트콩과 싸울 일이 없다. 흑인이라고 개 취급 받는 사람들이 여기 있는데, 내가 왜 폭탄과 실탄을 그 먼 곳의 사람들에게 쏟아 부어야 하느냐?”는 말은 정곡을 찌릅니다. 알리는 3년여간 선수 자격정지에 대법원 유죄판결 확정 시 5년간 수형생활을 해야 할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용기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알리는 흔한 말로 ‘떠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펀치를 맞아본 선수들은 “두 대 맞고 한 대만 쳐도 이길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망했습니다. 그의 오른손 펀치는 1000파운드(453㎏)의 위력을 자랑합니다. 왼손 잽은 속사포입니다. 20㎏ 이상 가벼운 전설의 복서 슈가레이 로빈슨보다 25% 빨리 주먹이 나온다고 합니다. 알리의 현역시절 동영상을 보면 15라운드를 쉴 새 없이 ‘나비같이 날아서 벌 같이 쏩니다.’ 엄청난 훈련의 결과입니다.
1971년 대법원의 ‘클레이 대 미국’ 판결에서 양심적 징집거부 면죄를 받은 알리는 링에 복귀합니다. 자격 정지 전 29전승을 기록한 알리는 3년 반의 공백 탓인지 춤추듯 움직이는 특유의 동작을 잃고 로프에 기대거나 서 있는 동작이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27승5패를 추가한 뒤 은퇴합니다. 미국의 한 언론은 2013년 “알리는 운동선수의 기준을 바꿨다. 민중의 해방을 위해 당신을 무엇을 했느냐, 건국 정신에 부끄럽지 않도록 당신은 무얼 했느냐?”라고 썼습니다.
알리의 반항적인 눈빛은 강렬합니다. 그 눈빛에는 찌질함을 버리고 부당함에 저항하라는 메시지가 가득합니다. 알리는 스포츠를 통해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웅변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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