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리우올림픽의 정치학
지난 2일(현지시각) 브라질 니테로이에서 브라질 정부가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2016 리우올림픽을 여는 데 반대하는 시위대들이 성화 봉송을 가로막으며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최루액을 뿌리며 저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극빈층 주민들이 행렬 막고 저지
경찰은 최루가스와 후추로 제압
세계 5대 경제대국 꿈 잃은 브라질
8만5천 병력 배치에 셀카봉도 금지 IOC “올림픽, 개도국 국책사업 못돼”
‘도시 중심 시민 올림픽’ 흐름 오독
국가 역량 잃고 치안으로 안전 도모
식인주의·열대주의가 돌파구 낼까
‘리우의 한숨’ 평창서 재현될 수도 1964년 도쿄올림픽도 복기할 필요가 있다. 그때, 성화는 오키나와에서 처음 상륙했고 열도를 행진해 도쿄에 입성했다. 오키나와의 첫 성화 주자는 2차대전 때 아버지를 잃은 전쟁고아였고 도쿄 주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최종 주자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 2세였다. 성화가 밝혀진 뒤, 일왕 히로히토는 흡사 종전 선언을 하듯 평화라는 주제의 개막 선언을 했다. 잔혹한 전범국가가 스스로를 단지 게임에서 졌을 뿐인 패전국가라고 선언하는, 원폭 피해까지 입었음에도 올림픽을 통해 평화를 호소한다는 악마적인 스펙터클을, 그해 8월에 지구 상공으로 떠오른 인공위성 신콤 2호는 인류 사상 최초의 위성 생중계로 전세계에 전송했다. 그 뒤로 올림픽의 성화는, 그리고 이를 정점으로 전개되는 개막식은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을 뒤섞어 그 나라의 국가 정체성을 안팎으로 각인하는 퍼포먼스가 됐다. 1980년대 악명 높은 대처 시대를 청년기로 보낸 아웃사이더들이 ‘성난 얼굴로 돌아본’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예외로 하고 보면, 수많은 소수민족 아이들이 인민해방군에게 오성홍기를 전달했던 2008 베이징올림픽이나 강력한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의 ‘글래머주의’가 압도했던 2014 소치동계올림픽이 최근의 극단적 사례다. 이 스펙터클의 가장 일그러진 사례로는, 심청과 비류 왕자가 인천 앞바다에서 세상의 중심을 외친다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을 들 수 있다. 인천 출신의 뛰어난 스포츠스타들 대신 한류스타가 최종 점화자가 된 이 대회는 스포츠를 수준 낮은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고 도시를 저렴한 상품으로 희화화한 자기 파괴의 기이한 사례다. ‘미래의 땅’ 브라질 그렇다면 리우는? 브라질 사람들은, 그리고 남미를 동경해 19세기에 대거 이민을 떠났거나 그곳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난 유럽인들은 그곳을 ‘미래의 땅’이라고 불렀다. 히틀러를 피해 남미로 가는 망명길에 음독자살한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렇게 불렀는데, 수탈과 가난과 독재의 현대사는 안타깝게도 브라질을 기약도 없이 ‘미래에만 머물러 있는’ 땅으로 만들었다. 20여년의 군사 독재가 끝나고, 일정 기간의 정치적 혼란과 조정을 거쳐, 종속이론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페르난두 카르도주가 대통령에 취임한 1995년을 전후로 브라질의 ‘미래’가 열렸는데, 그 이후 남미 일대의 브릭스 열기와 좌파 정권 열풍이 브라질식으로 흡착된 룰라 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은 월드컵과 올림픽을 2년 간격으로 유치하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월드컵 유치가 결정되던 2007년과 리우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2009년의 브라질은 ‘미래의 땅’이었다. 남부의 항구 도시이자 세계시민사회포럼의 교두보인 포르투알레그리에서는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깃발이 나부꼈고, 바로 그 도시의 파벨라(빈민가의 판잣집) 출신인 호나우지뉴는 축구를 중심으로 하는 최신 시설의 커뮤니티센터를 개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판세를 잘 못 읽고 3수 끝에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우리처럼, 브라질도 20세기 발전국가 모델에서나 통했을 올림픽 ‘경제 효과’라는 도박판에 너무 늦게 뛰어들었다. 올림픽을 통해 밖으로는 국위를 선양하고 안으로는 경제개발 효과를 기대하는 신드롬은 이미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2020 어젠다’를 발표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한풀 꺾인 부양책이다. 아이오시는 ‘2020 어젠다’를 통해 올림픽이 더 이상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국책 사업이 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1개국 1도시가 과중한 압력으로 겨우 올림픽을 치른 뒤에 거의 파산 지경에 처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아이오시는 두세 개 나라 혹은 서너 개 도시가 공동 개최를 하는 것은 물론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거나 뒷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재정 투여를 조절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는 뒤늦게 아이오시가 ‘개과천선’한 게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의한 판단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2012 런던올림픽 때는 이른바 ‘룰 40’을 적용해 막대한 돈을 낸 공식 후원사가 아니면 올림픽 휘장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했으나 그렇다면 차라리 빠지겠다는 글로벌 기업들의 방어 때문에 이번 대회에서는 ‘룰 40’을 대폭 완화해 선수 개별에게는 좀더 자유로운 마케팅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전향적 판단’이 아니라 위기의 대응이다. 리우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노르웨이 출신의 예르하르 헤이베르그 아이오시 위원은 향후 개최지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발전 도상의 국가보다는 경제적으로나 치안의 측면에서 북반구의 안정된 도시 위주로 가겠다는 방침이다. 2020 하계올림픽의 경우 이스탄불 대신 도쿄가 개최지로 결정됐고 2022 동계올림픽은 베이징으로 결정됐으며, 아직 미정이지만 2024 하계올림픽의 경우 아이오시는 아프리카나 인도의 도시들 대신 로마, 파리, 로스앤젤레스(LA) 등에 힘을 싣고 있는 중이다. 21세기 도시 생활자, 즉 올림픽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도 국가 중심에서 도시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요컨대 중앙 국가 주도형 ‘국민’ 올림픽의 시대가 저물고 개별 도시 중심의 ‘시민’ 올림픽이 부상하고 있는 국면에 따라 아이오시 스스로 ‘대규모 물량 투입에 따른 성공적 개최’가 아니라 기존의 도시 문화와 일상성에 기반하는 ‘문화 콘텐츠형 올림픽’을 모색하고 있는 국면인데, 브라질의 리우와 우리의 평창은, 판세를 잘 못 읽고 올인해버린 것이다. 치안국가 브라질 그 ‘미래’는 아쉽게도 짧게 끝이 났다. 올림픽을 유치할 무렵에는 정치적으로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도모할 정도였고 경제적으로 세계 5대 경제강국이 되리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두 요소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다. 가난했지만 온정이 흘렀던 파벨라는 마약과 테러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의 지지로 십수년째 버텨온 정권은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치안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2만여㎞를 달려온 성화가 리우의 대표적인 극빈층 거주지역 상곤살루를 지날 때, 지역 주민 50여명이 온몸으로 성화 봉송 행렬을 가로막고자 했고 이에 경찰은 최루가스와 후추 스프레이로 여지없이 제압해버렸다. 브라질의 좌파 내지는 중도 좌파 정부의 위기 및 치안국가적 대응 방식은, 고 이성형 교수의 논문 ‘라틴아메리카 중도 좌파 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에 대응해 취한 경제 정책의 실패에 따른 결과다. 그들의 정책은 “최빈층을 없애고 빈곤층을 줄이는 데 기능적이긴 하지만 빈곤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없”애는 데 취약했으며 “복지국가 건설이나 본격적인 재분배 정치를 펼칠 수도 없”었다. 대체로 2006년에서 2010년 사이의 일인데, 이 위기 국면에서 브라질은 월드컵과 올림픽이라는 엄청난 도박에 베팅을 했다. 하위 계급뿐만 아니라 중위 계급이나 연금생활자의 처지도 곤란해지면서 1차 산업 기반의 세계 5대 경제대국이라는 면모가 실은 ‘고용 없는 성장’임이 확인되면서, 그들에게 월드컵과 올림픽은 사회적 에너지를 모조리 올인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재정 계획이 불투명해지고 빈민층은 물론이고 중간층까지도 정치에 대한 환멸과 과도한 경제부양 정책을 외면하게 되자 브라질 정부는, 민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였음에도, 피치 못하게 ‘치안국가’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가, 사회적 안전을 도모할 만한 역량을 상실했을 때, 그것의 회복을 도모하기보다는 강력한 치안을 통해 국가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도모하는 현상, 즉 치안국가의 어떤 측면이 지금 브라질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미 대규모 스포츠 대회에서는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수준의 보안 검색이 이뤄지고 있다. 이번 리우 대회에서도 관중들도 테러 혐의를 받을 수 있는 도구들을 갖고 들어갈 수 없다. 칼, 드릴, 해머, 펜치, 방망이, 수갑 등이 잘 알려진 금지 품목들인데, 과연 누가 이런 것을 들고 입장을 시도할까 싶지만 어쨌든 이와 더불어 셀카봉도 금지 품목이다. 관중들의 셀카봉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온 우사인 볼트는 이번 대회에서는 그런 추억을 남길 수 없게 됐다. 이와 더불어 대테러 작전은 일찌감치 진행되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8만5천명의 경찰과 군인을 올림픽 기간 중 도심 곳곳에 배치했다. 크고 작은 범죄와 용의주도한 테러, 그 자체는 엄격히 금지돼야 하고 철저히 막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할 것은 무려 8만5천여명의 경찰과 군인이 동원돼야만 하는 스포츠 대회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제 올림픽은 ‘인류의 제전’이 아니라 ‘치안올림픽’이 되었다. 이 대규모의 정교한 치안 병력은, 올림픽 이후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들, 하위 계급의 불만과 중위 계급의 불안이 중첩된 각종 소요에 선제적으로 맞서는 통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 모의훈련이자 실전으로서 올림픽만큼 효과적인 계기가 어디 있겠는가. 다시, ‘식인주의’의 힘으로 그래도 한 가지 기대되는 것은, 2012 런던올림픽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브라질의 문화예술을 주도하는 인사들이 지난 1960~70년대 열대주의 문화운동의 주인공들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세계를 강타한 청년문화운동의 브라질판이라고 할 수 있는 열대주의는 1928년 오즈바우드 지 안드라지가 발표하고 주도한 ‘식인주의’ 문화운동에 젖줄을 대고 있다. 브라질로 밀려드는 세계의 문화예술을 ‘식인 풍습’처럼 집어삼키고 이를 맘껏 소화해 토해내면 전례없이 아름답고 독특한 브라질 문화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식인주의와 열대주의다. 이 혼종성의 힘으로 브라질은 수탈과 가난과 독재를 이겨냈다. 그들이 이겨낸 고통에 비하면 지금 리우를 정점으로 산재한 문제들은 어쩌면 놀라운 식인주의와 열대주의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힘들이 과연 이번 올림픽에서, 특히 개막식에서 아름답게 펼쳐질 것인가, 바로 이 점이 오늘 우리가 늦잠 대신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진짜 이유다. 아마도 그들은 틀림없이 그러한 힘들을 보여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다. 우리는 메르카토르식 지도만이 아니라 남미에 대한 편견부터 버려야 한다. 아마도 개막식에서는 브라질 전통의 삼바 퍼포먼스가 어떤 식으로든 펼쳐질 것인데, 공이나 차고 춤이나 추는 식의 낡은 편견을 없애고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 흥겨움 속의 힘들, 그 격렬함 속의 슬픔을 느껴보자. 우리의 편견과 달리, 남미를 대표하는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삼바는 검고 가난하고 경찰의 쫓김을 받는 자들의 피난처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브라질의 가난한 사람들은 “영혼을 애무해주는 삼바 리듬”에 몸을 맡긴다. 그 순간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왕이 되고, 모든 불구자가 성한 자가 되고, 모든 따분한 자가 아름다운 미치광이가 되는 축제”가 벌어지며 곧 “세상은 삼바 리듬을 따라 숨쉰다”. 혹시, 바로 지금 이 순간, 그와 같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리우 다음이 평창이다. 그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다. 그들의 한숨은 우리의 한숨이다. 그들이 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위협적인 치안국가로 간다면 우리도 그리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열광은 우리의 열광이다. 브라질이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미래의 땅’이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니 깊은 애정으로 리우를 보자. 정윤수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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