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선 한국 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이 지난달 29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2017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대회 디비전 1 그룹 A 마지막 우크라이나와의 경기에서 승리해 내년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확정한 뒤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하키포토 제공
백지선(50·영어명 짐 팩) 한국 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이 최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대회에서 사상 처음 1부리그인 월드챔피언십(16개국) 승격을 이루면서 그의 신뢰와 소통의 리더십이 조명받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선수 233명의 저변에서 일군 기적 같은 일입니다. 당장 12개 나라가 출전하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활약을 기대하는 팬들이 늘었습니다. 하루 24시간 아이스하키만 생각하는 그의 리더십을 탐구합니다.
지난달 사상 첫 월드챔피언십 승격
사령탑 3년 만의 ‘우크라이나 기적’
명예의전당에 유니폼 건 선수 출신
2014년 대표팀 맡아 “매일 전진”
시설·선수층 열세 극복한 소통·신뢰
데뷔전 대패에도 “판타스틱” 격려
슛타임 줄이고 음식 관리도 철저
“귀화 선수들 역시 한국인” 화합
선수들 호응하며 절대 믿음·자신감
“우리는 개인 아닌 팀으로 이긴다”
휘둥그레졌다. 20년 동안 이런 적은 없었다. 옷걸이에 걸린 유니폼 상의, 아래 놓인 헬멧과 장갑, 옆에는 스틱까지 선수 22명의 장비가 가지런하다. 군대 내무반 관물대를 복제하듯 똑같았다. 선수들은 눈을 의심했다. “이게 우리 라커룸 맞나?” 그렇다. 백지선(50) 감독과 박용수(41) 코치 둘은 선수 장비부터 정성스레 배치했다. 20살 이하 대표팀 지원에 나섰던 이정선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차장은 “선수들한테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키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 최초의 NHL 선수
2014년 12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20살 이하 세계대회. 한국의 청소년대표 선수들의 충격은 ‘백지선 전과 백지선 후’로 갈리는 한국 아이스하키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꿈의 무대’인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출신의 총감독과 코치가 정돈한 라커룸. 그 새로운 풍경은 ‘너희는 최고의 선수야. 그렇게 대접받아야 해!’라는 메시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복장 지침까지 내려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선수단 관리 비용은 더 커졌다. 하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존중감을 얻었다. 국가대표 수비수 이돈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국제대회에 나가면 헬멧부터 스케이트, 스틱까지 각자가 다 챙겼다. 집에 가져갔다가 공항 체크인도 알아서 했다. 현지에 도착해서도 각자가 시합할 때 가져가야 했다. 백 감독은 달랐다. 갑자기 우리가 대단한 선수가 된 것 같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백지선은 한국인 최초로 북미아이스하키리그에서 뛰었다. 그의 엔에이치엘 입성과 두 차례의 스탠리컵 우승(1992·93년)을 기리기 위해 피츠버그 펭귄스에서 입었던 그의 유니폼은 ‘아이스하키 명예의 전당’에 걸려 있다. 인종적 편견을 뚫고 북미아이스하키리그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힘을 키우기 위해 주차장에서 트럭을 밀고, 자전거를 타고 앞서가는 아버지를 따라 롤러를 타며 마을 전체를 도는 등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의 또다른 꿈은 아들이 한국 대표팀을 이끄는 것이었다. 2003년 선수 은퇴 뒤 코칭을 시작했고, 2005~2014년 아메리칸아이스하키리그(AHL)의 그랜드래피즈 그리핀스의 수석코치로 실력을 쌓은 데는 아버지의 기대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팀 사령탑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 감독의 영입을 추진했던 양승준 2018 평창겨울올림픽 준비기획단장의 회고다. “2014년 당시 르네 파젤 국제아이스하키연맹 회장은 올림픽에 대비한 한국의 전력 강화를 위해 외국 감독을 4명이나 추천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외국 감독들은 ‘연봉’과 ‘주거’ 등 조건만 따졌다. 반면 우리가 마음속에 두고 있던 백 감독은 첫 교섭에서부터 달랐다. 오히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한국에 가서 확인한 뒤 결정하겠다’고 했다. 책임감 때문으로 보였다.”
백지선(오른쪽) 한국 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과 박용수 코치가 지난달 29일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하키포토 제공
실제 백지선 감독은 2박3일 일정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첫날 태릉의 상무 연습 현장을 찾아간 뒤, 오후엔 실업팀 하이원의 고양 빙상장을 방문했다. 별로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게 양승준 단장의 기억이다. 그러나 다음날 비교적 인프라나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안양 한라의 연습장을 찾아가 선수를 본 뒤에는 달라졌다. 이날 저녁 정몽원 회장과 저녁을 먹기 10분 전, 백지선 감독은 “형, 내가 맡아볼게”라고 말했다.
대학과 실업을 포함해 성인 등록선수 233명. 아이스하키 링크의 수도 47개. 아이스하키가 국기인 캐나다의 선수층과 시설에 대비하면 대학생과 초등학생의 우열이 난다. 하지만 백 감독은 한국 아이스하키의 잠재력과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2014년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로챌린지 대회 때 백 감독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평창올림픽까지 매 발걸음 조금씩 나아져야 한다. 날마다 어제보다 나아진 선수들을 경험하고 있다. 더 배우려고 하고 노력하는 선수들을 보면 신이 난다. 이런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백 감독은 사령탑 데뷔전인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1-6으로 대패한다. 그런데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백 감독은 오히려 “판타스틱” “엑설런트”를 연발하며 선수들의 기를 살렸다. 대표팀은 이후 난적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차례로 꺾으며 2위를 차지했다.
스피드와 ‘벌떼 하키’로 무장
백 감독의 평창 준비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는 지금도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1, 2, 3년차의 교육이 다르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은 꾸준히 강조한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늘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지난달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세계 16강이 겨루는 월드챔피언십으로 승격해 3년 새 3부에서 1부 리그로 진출한 것도 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국 강호에 비해 선수 체격이 작으면 한국의 강점인 스피드를 살리고, 기술적으로 부족하면 혼자가 아니라 두세 명이 달라붙는 ‘벌떼하키’로 맞섰다.
국가대표팀 공격수 안진휘는 “상대를 쉽게 두지 못하도록 한다. 언제라도 압박을 해야 한다. 판단의 속도가 빨라야 한다. 동료의 몸동작만 봐도 약속된 위치에 가 있을 수 있도록 훈련한다”고 했다. 박용수 코치가 비시즌 여름 동안 지상훈련 중심으로 하는 ‘엑소스’ 체력훈련도 우크라이나 세계대회 때 한국의 후반 집중력을 이끌어내면서 위력을 드러냈다.
디테일은 백 감독의 힘이다. 비디오 분석을 통해 선수단을 개조하고 상대 전술을 파악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대표적이다. 대표팀은 3월 러시아와의 2차례 평가전 직전 북미아이스하키리그의 수준급 선수들의 슬랩샷, 스냅샷, 리스트샷 등을 동영상으로 편집했다. 그것을 한국 대표선수들의 슛 동작과 비교해보니 많게는 1초 정도 빨랐다. 평소에 조금은 늦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선수들도 시각적인 자료로 1초에 이르는 시간차를 확인하자 크게 놀랐다. 백 감독은 공을 잡아두는 순간부터 칠 때까지 “잡스러운 동작”을 줄이라고 요구했다. 실제 이런 교육은 이번 세계대회에서 톡톡히 효과를 냈다. 신상훈, 김기성, 안진휘 등이 이번 세계대회에서 슛 타임을 빠르게 가져가는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공격수 출신인 박용수 코치한테 경기 중 수비수 작전을 지시하도록 하고, 수비수 출신인 자신은 공격수를 주로 지도하는 것도 영리한 역할 분담이다. 공격수 출신이 상대 공격수를 껄끄럽게 하는 법을 알고, 수비수 출신은 상대 수비수의 약점을 더 쉽게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승리의 마음가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쓴다. 수비 전술을 지도하기 위해서 경기 장면 비디오를 리플레이할 경우가 있다. 그런데 비디오 편집은 수비의 허점이나 상대 공격의 강점을 설명하는 데서 끝난다. 절대 그 이후에 골을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문제점을 개선하면 되는 것이지, 괜히 골 먹는 장면을 또 보여줘 선수들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필요는 없다. 2월 경기도 고양에서 열린 4개국 초청대회에서 한국은 헝가리에 진 적이 있다. 그때 박용수 코치는 선수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강인한 구릿빛 인상의 박 코치는 “오늘을 잘 기억해라. 두달 뒤 세계대회에서 갚아라”며 호흡 조절을 주문했다. 한국은 지난달 우크라이나 세계대회에서 헝가리에 3-1 역전승을 거뒀다.
선수들의 음식도 백 감독이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그동안 대표팀 선수들은 국제대회에 나갈 때 라면이나 카레 등 인스턴트 음식을 한 보따리 싸갔다. 하지만 백 감독 아래서는 불허다. 선수들은 과거에 먹던 컵라면이 당겨도, “현지식에 적응하라”는 엄명에 꿈도 꾸지 못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대회 때 선수들은 교민들이 날라 준 김치로 그나마 한국 음식 맛을 봤다. “호텔 식사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김치 아니었으면 못 먹었을 것 같다”는 하소연을 하지만 인스턴트나 탄산음료를 끊은 선수들이 느끼는 몸상태는 확실히 다르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은 한국에서 열리기에 선수들은 먹는 것에 있어서는 흡족해할 것 같다.
“우리 승리는 마을 전체의 노력”
선수들을 대할 때도 신중하고 섬세하다. 주로 전체를 대상으로 얘기하고, 필요할 경우 면담을 하거나 한쪽으로 불러 지도를 한다. 백 감독의 아이스하키 전술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항상 “너희가 최고다” “너희는 잘할 수 있다”고 칭찬해 동기를 끌어올린다. 기술적으로 세밀하게 들어가면 전혀 모르던 것을 새로 알려주기도 한다. 이럴 땐 선수들이 신이 나서 질문을 한다. 과거 얼음판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르다. 선수들의 열성과 감응도가 높아지면서 감독은 절대적으로 신뢰를 받는 존재가 됐다. “지시하는 대로 하니까 이겼다” “상대가 두렵지 않다” “서로 도우려는 팀 분위기가 좋다”는 평이 선수들 사이에서 나온다. 김정민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홍보팀장은 “과거와 달리 선수들이 국제대회 상대팀 선수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금은 먼저 긴장하지 않고, 한 골 먹으면 두 골 넣으면 된다고 담대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귀화 선수 7명이 한국 선수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한국팀이 강해진 이유다. 애초 백지선 감독은 외국인 선수를 평가할 때 “실력보다는 인성”을 중시했다. 어차피 우리 선수들과 하나가 돼 움직여야 하는데, 모가 나거나 튀면 팀 조직력에 금이 간다. 골리 맷 달튼을 영입한 것은 한국팀 전력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린 요소다. 달튼을 비롯한 귀화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한테 자극제가 되면서 팀 역량은 훨씬 강화됐다. 이런 외국인 선수를 향해 “외국인 선수”라고 말하면, 백 감독은 매우 강경하게 “외국인이 아니다. 한국 선수”라고 정정을 요구한다. 올림픽 무대의 강적과 맞서기 위해서는 “팀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이 모든 선수들에게 각인됐다. 1~2년 전에는 개인의 욕심을 내는 선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영웅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안다.
바위처럼 굳센 백 감독도 인간이다. 지난달 우크라이나와의 마지막 경기 승리로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했을 때는 평소의 냉철함과 달리 울컥했다.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어서 ‘우크라이나의 기적’으로 불리는 성취에는 그의 리더십이 큰 구실을 했다. 하지만 백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는 한 마을 전체의 노력이 필요했다”는 영어식 표현을 썼다. 위로는 정몽원 회장으로부터 아래로는 장비 담당 직원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력해서 일군 것이지, 자기가 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비교 대목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확하게 내 말뜻을 알아달라. 히딩크 감독과의 비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히딩크 감독과 비교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정색을 했다.
지난해 7월부터 서울에 온 아내와 딸은 집에서도 하키만을 생각하는 백 감독에게 “여보, 유 아 히어(You are here)”(여보 여기는 집이에요)라는 핀잔을 한다. 백 감독을 보좌하는 재미동포 비디오분석관 샘 킴은 “하키 생각을 안 하면 감독님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우리도 하루 종일 하키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잠자는 시간에도 하키를 생각하는 백 감독은 “아이스하키 세계에서 현실(가정)로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웃는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 주요국 아이스하키 등록선수와 링크 수
한국 총 등록선수 2591명
성인 등록선수 233명
실내외 링크 47개
일본 총 등록선수 1만8988명
성인 등록선수 9505명
실내외 링크 157개
캐나다 총 등록선수 63만9500명
성인 등록선수 9만7000명
실내외 링크 8250개
스위스 총 등록선수 2만6898명
성인 등록선수 1만1129명
실내외 링크 189개
체코 총 등록선수 10만9103명
성인 등록선수 7만9838명
실내외 링크 169개
* 한국, 캐나다, 스위스, 체코는 평창겨울올림픽 A조. 자료: IIHF 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