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C 보고서 전문에 드러난 러시아 도핑 뒷얘기
일부 선수들은 돈 얽혀 도핑 프로그램에 속박
일부 선수들은 돈 얽혀 도핑 프로그램에 속박
‘스포츠 강국’ 러시아를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에선 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소치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딴 피겨 선수 소트니코바는 그렇다 치고 ‘제2의 김연아’라 불리는 메드베데바는 어떻게 되는 걸까.
기자의 초중고교 시절 체육 과목 성적은 수우미양가 중 오직 ‘아름다울 미(美)’였다. 그 일관된 평가를 통해, 잘하고 강한 것보다 정직하고 아름다운 것이 체육의 가치라 배웠다.
그래서 일단 궁금했다. 왜 선수들은 생명과도 다름없을 몸뚱이를 도핑에 내맡겼을까. 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말하자면 악마와 거래한 선수 개별을 징계하는 대신 국가대표 단위의 출전 자체를 금지한 것일까. IOC가 6일 새벽 내놓은 ‘이사회 보고서’를 보고 의문을 풀어봤다.
우선 두 번째 질문 ‘국가대표 단위 출전 금지 이유’에 대한 답부터 IOC의 보고서에서 추리자면, ‘도핑은 사실상 러시아 정부의 체계적, 재정적 지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IOC는 지난 12월 2일치 이사회 보고서를 내기까지 17개월 동안 이 사안을 조사했다. 보고서에는 러시아와의 갈등, 시비 등에 대한 예상이 당연한 것이어서 조심스러운 태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IOC는 “문서나 불편부당의 증거에만 근거한” ‘사실적 관점’에서의 결론이라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문구엔 수많은 함의가 숨어 있다. IOC는 자신의 결론과 별도로 그간의 여러 조사 경로와 보고서를 자신들의 보고서에 포함해 세세히 밝혔다.
러시아 선수의 도핑 의혹을 첫 공론화시킨 건 2014년 말 독일방송(ARD)의 보도였다. 프로그램 제목이 ‘1급 기밀 도핑 : 러시아가 어떻게 승자를 만드나’였다. 러시아육상협회 차원의 정교한 도핑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는 게 요지다. 주요 제보자가 있었다. 반도핑 연구 담당인 ‘모스크바 연구소’의 직원 비탈리 스테파노프와 그의 아내 율리야. 율리야 본인이 2013~15년 도핑으로 경기 출전을 금지당한 러시아 육상 국가대표였다.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심층 조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지난해 6월 리처드 매클래런 교수에 의한 예비보고서, 12월 최종보고서가 나온다. 모스크바 연구소 출신으로 2016년 미국 망명한 그리고리 롯첸코프 박사가 <뉴욕타임스>에 폭로한 내용의 진실성이 상당하다는 게 결론 중 하나다. 내부 고발로 현재 살해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롯첸코프 박사가 제공한 문서, 이메일 등을 통해 “정부 차원에서 도핑 대상자를 가리는 시스템을 2011~2015년 운영했”고 “도핑 샘플을 조작했다”는 내용이다.
도핑 샘플 조작은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때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샘플(소변)을 러시아연방보안국 요원이 바꿔치기한 것 등을 말한다. 연구소에서 직접 폐기한 것들도 적지 않다.
롯첸코프 박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러시아 선수들의 3분의 2, 2012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의 절반이 도핑을 했고, 공적 프로그램으로 관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자세한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자신이 연구소 소장으로서 러시아 체육관광부에 직접 예산을 요청해 따냈고, 400개가 넘는 선수들 도핑 샘플을 또한 직접 폐기하기도 한 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정부 관료, 기관 관계자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수신자(참고인 포함)들은 아직도 다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국가는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그러할 수 있겠다. 선수들도 모두 같은 이유일까. 국가를 위해 악마와 거래했을까. 다시 첫 번째 질문 ‘왜 선수들은 생명과도 다름없을 몸뚱이를 도핑에 내맡겼을까’로 돌아가 보자.
차라리 단순한 승부욕이나 육체적 한계에 도전한다 따위, 그나마 수용될 만한 설명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IOC 보고서엔 없었다. 보고서는 오히려 ‘선수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 구조’가 한 요인으로 작동했음을 확인했다.
는 세계반도핑기구 독립위 첫 보고서 내용(2015년 11월)이 그렇다.
독일방송이 러시아 육상협회의 도핑 시스템 운영 의혹을 고발한 이후 세계반도핑기구가 내놓은 보고서로 사실상 초기 “러시아가 선수들과 팀의 승률을 높이거나 담보하기 위해 도핑을 통한 속임수를 폭넓게 사용했음을 확인했다.”
“러시아 육상 선수들의 광범위한 도핑 사용뿐 아니라 의사, 코치, 연구소 직원들이 결탁한 도핑 문화가 아주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점도 보고서는 지적했고, 그 맥락에서 국가와 선수 간 경제적 착취 구조를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러시아 선수들이 도핑 프로그램에 선택되어 지원받을 수 있던 건 아니다. 외국인 귀화 선수는 애초 이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단 사실도 이번 조사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핑 대상은 ‘Save’(구하다)와 ‘Quarantine’(격리·차단하다)으로 분류되었는데, 타국 출신 선수는 ‘자동 격리’였다.
IOC는 이번 보고서에서 “러시아 정부의 최고 권위(대통령 등)에 의해 도핑 시스템이 인지되거나 지원되었다고 볼 만한 어떤 증거나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이미 비탈리 뭇코 체육관광부 장관이 “2011~15년, 우리 부가 해마다 우리 국가 선수들의 도핑 조사샘플 1만2000에서 2만개씩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 재정 지원을 했고, 이게 결과적으로 매년 160~200가지의 반도핑 규정을 어긴 결과를 초래했다”고 시인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푸틴 대통령 또한 올 3월 2019년 겨울 유니버시아드 대회 준비 모임에서 “러시아에 국가 차원의 도핑 지원 시스템은 없고, 바라건대 없을 것이다. 오직 반도핑 조처만 있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반도핑 시스템은 실패했다. 우리 잘못이다”라고 말한 것이 적혀 있다.
러시아는 오는 12일 평창 겨울올림픽 출전 자격을 최종적으로 IOC로부터 확정받는다. 끝내 출전 금지라면 출전을 원하는 선수는 러시아 국기 대신 오륜기를 가슴에 달고, 러시아 출신의 올림픽 선수 자격으로 경기할 수 있다.
러시아 선수들이 어떤 성적을 받더라도 ‘아름다울 미’밖에, 또는 비로소 ‘아름다울 미’를 받을 수 있는 셈이 되었다. 피겨 여신 메드베데바가 평창에서 ‘아름다울 미’를 받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올 1월 체코 오스트라바에서 열린 2016-201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유럽 피겨스케이팅선수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김연아 선수의 최고점수를 깬 러시아 피겨선수 에브게니아 메드베데바(18).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조사된 도핑 테스트 샘플(당시 도핑규정 위반 사례 114건 가운데 39건이 러시아 선수 관련)이나 2014년 소치겨울올림픽의 샘플을 다시 분석한 결과, 러시아에 도핑 문화가 널리 퍼져있고, 오랜 기간 수많은 종목에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왼쪽)과 자무엘 슈미트 IOC 조사위원장이 5일 스위스 로잔에서 집행이사회를 마친 뒤 정부가 도핑을 주도한 러시아를 평창 겨울올림픽에 출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로잔/EPA 연합뉴스
2014년 소치겨울올림픽 때 환호하는 러시아 피겨선수들.
“선수 일부는 (정부의) 도핑 프로그램에 포함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고, 그 때문에 계속해 국제 경기에 참가해 성과를 내야 했을 만큼 ‘금전적 착취’ 상태에 있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