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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포츠일반

35시간 걸린 여자핸드볼팀 러시아 입성기

등록 2005-12-04 14:30

“모스크바가 싫다.” “러시아가 싫다.”

제17회 세계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한국여자핸드볼대표팀의 고생이 말이 아니다. 기자는 오는 6일(한국시각) 러시아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막을 올리는 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과 함께 지난 2일 서울을 떠났다.

선수단은 이날 오전 9시 태릉선수촌을 출발해 오전 10시께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낮 12시 40분 인천발 모스크바행 러시아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대회가 열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직항노선은 여행 성수기인 여름에만 개설되기 때문에 선수단은 부득이 모스크바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또 모스크바행 국내 항공기를 이용하려 했지만, 러시아 여행 비수기인 겨울철이라 노선이 줄어들어 선수단 출발 날짜와 맞지 않았고, 항공기 요금도 훨씬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어 러시아 항공기를 택했다.

비행기는 무척 낡아 보였다. 좌석번호판은 거의 다 지워져 잘 보이지도 않았고, 안전띠는 잘 조여지지도 않았다. 안내 방송이 나오다가 끊어지며 가래끓는 소리로 귀를 괴롭히기도 했다. 비행기 안은 한산했다. 핸드볼 선수단을 제외한 승객은 20~30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21명의 선수단은 다리를 주욱 뻗거나, 아예 좌석에 길게 누워서 모자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은 자도 자도 끝이 없었다. 선수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멀미였다. 출발 때부터 항공기의 오르내림이 심해 선수들을 놀라게 하더니, 비행 도중에도 간간이 아래로 뚝 떨어지거나 위로 쑤욱 솟구쳐 뱃속을 요동치게 했다. 도착 20분 전부터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고, 적지않은 선수들이 멀미 증세로 고생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시각은 러시아 시간으로 오후 4시50분. 해는 이미 서산으로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선수들은 모스크바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새벽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이 때부터 선수들의 ‘노가다’가 시작됐다.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선수단은 20~30㎏씩 나가는 21개의 개인별 짐에다가 각종 장비와 먹거리 상자가 10여개를 39인승 버스에 실어날랐다. 이를 모두 합친 무게만 해도 족히 1t 가량 돼 보였다. 모스크바 시내의 도로는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이라 차량들로 넘쳐났다. 차들로 꽉 막힌 도로를 헤쳐나가 한국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선수단은 밤 9시께에야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서도 방으로 짐을 나르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다.

선수들은 8시1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튿날 새벽 4시30분에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사실 선수단은 시차 적응을 위해 지난달 7일 유럽 전지훈련을 마치고 지난달 22일 서울에 귀국한 뒤에도 잠자는 시간과 훈련 등을 러시아 시간에 맞춰 놓았었다. 한국 시차에 적응된 기자의 경우 한국 시간으로 오전 11시30분(한국과 6시간 시차)에 일어나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았지만, 이미 러시아 시각에 익숙해진 선수들에겐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빵과 잼, 소시지 등으로 아침식사를 떼운 선수들은 다시 50분 가량 버스를 타고 모스크바 국내선 공항인 쉐르메치보 공항에 도착했다. 선수들이 움직일 때마다 1t 남짓한 짐도 따라다녔다. 사람과 짐이 모두 버스에서 내린 뒤 쉐르메치보 공항에 들어선 순간, 폭설로 비행기가 2시간 가량 연착됐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선수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고된 훈련을 마친 고단한 몸으로 한국을 떠났는데, ‘러시아’는 번번이 한국 선수들을 실망시켰다. 선수단에 사이에서는 “이건 한국 선수들을 두려워 한 러시아의 음모다”, “모스크바가 싫다”는 농담이 튀어나왔다.

선수단은 그 많은 짐을 공항 한구석에 모아둔 뒤 대기실 의자에 앉아 하염없는 시간을 보냈다. 선수들은 모자란 잠을 청하거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짐을 부치는 시간이 반가웠다. 무엇인가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이렇게도 반가울 줄이야. 그런데 공항 직원은 짐 속의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선수단을 피곤하게 했다. 물리치료기가 들어 있는 짐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며 칼로 뜯어내기까지 했다. 자기 나라에서 열리는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외국 선수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를 넘는 짐 검색은 그칠 줄 몰랐다. 모든 짐이 간신히 검색대를 통과하고 짐을 부쳤지만, 이번에는 “무게가 초과됐다”며 딴지를 걸고 나왔다. 서울에서 모스크바에 올 때도 초과요금은 없었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초과요금을 지불한 뒤 비행기에 탑승했다. 모스크바행 상트페테르부르크발 러시아 비행기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좌석은 비좁았고, 창가쪽 자리에는 물까지 뚝뚝 떨어졌다.

1시간30분 가량의 비행 끝에 낮 12시(한국시각 오후 6시),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다. 태릉선수촌을 떠난 지 꼭 33시간 만이다. 대표팀 최석재 트레이너는 “85년 유고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갈 때 33시간이 걸렸었다”며 “당시에는 러시아 상공을 경유하지 못해 오래걸렸다”고 말했다. 1940~50년대 배를 타고 수십일씩 걸려 국제대회에 참가했다는 선수들이 문득 생각났다. 33시간 만에 도착한 상트페테르부르크지만 선수들은 ‘전장’에 도착하자, ‘전의’가 피어나는 듯했다. 강태구 감독은 “전쟁터에 오니까 정신이 맑아진다”고 농담을 건넸다. 몇몇 선수들은 짐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컨베이어 벨트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스트레칭을 하며 ‘전의’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여정은 조금 더 남아 있었다. 버스에 짐을 싣고 호텔로 향했다. 이제 선수들은 1t 가량의 짐을 버스에 싣는 일에 능숙해졌다. 호텔에 도착한 뒤 방마다 짐을 나르는 일까지 마친 뒤 선수들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무려 35시간의 기나긴 여정 끝에 진짜 ‘전쟁터’에 도착한 것이다.

대회 조직위는 이날 각국 선수들에게 훈련 장소조차 개방하지 않았다. 공식 훈련은 4일부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오후 5시부터 호텔 앞과 호텔 복도에서 2시간 가량 훈련을 하며 긴긴 여행에 찌든 몸을 땀으로 닦아냈다. 아테네올림픽 ‘아줌마 투혼’을 잇는 한국여자핸드볼 ‘젊은 피’들의 활약상은 6일 새벽 1시(KBS SKY 생중계) 슬로베니아 전부터 시작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한겨레> 스포츠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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