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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일제 강점기 비운의 스포츠 스타 / 김창금

등록 2019-03-03 17:45수정 2019-03-03 21:11

“십삼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중략)…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송곳 세울 틈도 없이…(중략)…오후 이시경에는 십만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중략)…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 대경주회의 명예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매일신보> 1913년 4월15일치는 당시 전조선 자전거경주대회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남대문에서 용산 연병장까지 전차가 연이어 수송해도 탈 자리가 없어 도보나 인력거로 모여드는 사람이 엄청난 무리를 이뤘다고 전한다. 10만의 숫자가 정확한지는 가릴 수 없으나 당시 ‘자전거 왕’ 엄복동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엄복동을 연구해온 하웅용 한국체대 교수는 “엄복동은 지금으로 말하면 김연아나 손흥민급의 초기 한국의 대중 스포츠 스타였다”고 설명했다.

자전거상회 점원 엄복동은 1910년 서울 훈련원에서 열린 자전거대회 첫 출전 우승 뒤 1924년 은퇴 때까지 각종 경기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경주왕’이었다. 중국까지 원정을 가 명성을 떨치면서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엄복동이 일본 선수를 꺾고 우승하면 식민지 백성은 민족적 자긍심을 느꼈고, 심판진의 방해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땐 집단적으로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엄복동은 자신의 자전거 우승 사진을 엽서에 박아 1원에 파는 등 아주 초보적인 형태의 스포츠 마케팅 기질도 발휘했다. 당시 물가와 비교할 때 잘나가던 엄복동의 대회 초청료나 우승 상금·상품의 가치는 높았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은퇴 뒤 몇차례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고, 해방 뒤에도 노익장을 과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는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돼 있다. 특히 1926년 장물 자전거를 처분해준 혐의로 법정에서 1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큰 오점이다. 말년의 곤궁한 삶에 이어 6·25전쟁 때 의정부 부근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것은 스포츠 영웅의 마지막치고는 허무하다.

암울했던 시절 스포츠 명사로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준 그의 흔적은 의정부 벨로드롬 경기장 앞에 세워진 동상과 그가 탄 것으로 알려진 영국 러지사 제작 자전거에 남아 있다. 최근에는 영화도 나왔다.

김창금 스포츠팀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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