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요리는 못 먹으니 김치 깍두기 고초장이 없으면 밥을 못 먹기로 유명한….”(1947년 4월22일치 경향신문) “최후의 몇 마일을 앞두고는 스파이크 끈이 풀어졌음에도 똑같은 보조로 계속하였다.”(1947년 4월22일 동아일보)
1947년 4월19일 서윤복이 51회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하자 이틀 뒤 국내 언론은 그의 승리를 크게 보도했다. “동양인 최초의 우승” “2시간25분39초 세계 신기록” “조선 청년의 의기” 등 극적인 요소는 많았다.
2개월 뒤 귀국하자 서울 중앙청 앞에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열렸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는 뜻의 ‘족패천하’라는 휘호를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양재성 대한육상연맹 고문은 “해방 이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으로 매일같이 싸웠다. 학교도 좌우로 갈렸는데, 서윤복 선생의 우승 소식에 삼천만 동포가 하나가 됐다. 하늘도 땅도 울었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서윤복 일행의 보스턴 여정은 쉽지 않았다. 손기정 선생이 감독으로 서윤복과 남승룡으로 팀을 구성했지만 여비가 없었다. 당시 언론은 “원한경 박사가 오천불을, 러치 군정장관을 비롯해 장관급에서 천오백불을 희사해” 떠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미 군정 치하에서 군용 비행기까지 얻어타야 했다.
서윤복이 입고 뛴 러닝셔츠에는 ‘KOREA’라는 영문 아래 미국 국기 문장과 태극기가 나란히 장식돼 있었다. 일제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 민족의 비애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서윤복은 1948년 런던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재에는 밝지 못했고, 말년에는 오래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2013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선정됐지만, 대한체육회로부터 약간의 생활보조를 받은 것 외에는 연금 혜택이 없었다. 과거 한국 마라톤의 영광도 2000년 이봉주의 한국 신기록을 정점으로 세계와의 격차를 보이며 퇴색했다.
2017년 타계 뒤 정부의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돼 국가유공자가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14일 서윤복 선생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창금 스포츠팀 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