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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주비위’ 조인환 운영위원장

등록 2005-08-10 21:20

조봉암 묘지엔 비석만 외롭다

지난 7월 30일은 죽산 조봉암 추모일이었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46년째였다. 그러나 서울 망우리 그의 묘지엔 여전히 비문 없는 비석만이 외로이 서 있었다.

올해는 광복 60돌. 그래서 ‘죽산 조봉암선생 명예회복 범민족추진주비위원회’ 운영위원장 조인환씨(72)는 이번 추모제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제대로 평가한 뒤 이같은 내용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비문에 새길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무현 정권이 일제하의 왜곡된 과거사의 재조명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제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추모제 나흘 뒤 8·15 광복절을 앞두고 국가보훈처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에게 서훈을 추서했지만, ‘조봉암’이란 이름은 빠져 있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46년사회주의 독립운동 서훈명단에조봉암이란 이름은 없었다

조씨는 <민주신보>, <국제신보>, <부산일보> 등을 거쳐 <한국일보>에서 1987년 퇴직한 뒤 출판사를 하면서 줄곧 죽산의 복권을 위한 일에 매진해왔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눈빛이 형용한 조씨는 50년대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할 당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죽산의 유세를 들으면서 그의 인물됨을 보았고, 이승만과 조봉암이 격돌했던 1956년 대통령 선거 때 한 투표장의 부정 현장을 생생히 취재한 적도 있었다. 그 선거에서 조봉암은 비록 200만 표차로 패했지만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승만의 당선은 최대 정적 신익희 후보가 선거도중 급사와 부정선거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2백만 표차는 사실상 조봉암의 승리로 받어들여 졌다. 2년 뒤 이승만은 죽산을 남북한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간첩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형했다. 조씨는 이승만의 잔혹한 정적 살해에 비분강개하던 진보당 간부 조규택씨로 부터 “꼭 죽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유언을 들었다.

그 뒤 조씨는 ‘조봉암’의 누명을 벗기는 일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조봉암’을 보듬고 보훈처로, 국회로, 신문사로 다닌지 벌써 20년이 다 됐다. 하지만 ‘조봉암’은 누구하나 반기기는 이 없이 극히 꺼리는 이름이었다.

“죽산은 3·1운동 때 강화도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해 6개월 징역을 살고,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대학을 나온 뒤 중국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다 1932년부터 신의주형무소에서 꼬박 6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해방 6개월 전에도 다시 일제의 감방에 들어갔다가 광복과 함께 풀려났지요. 그 분이 반일 독립운동을 하고 형을 살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지요.”

그런데도 죽산은 1967년 제정된 상훈법에 ‘사형, 무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자‘의 서훈을 치탈(박탈)한다는 조항 때문에 오랫동안 아예 서훈 심사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항일운동하다 7년 옥살이누명쓰고 죽은 것도 억울한데서훈 대상마저 안된다니…”

“죽산이 사형을 당한 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승만의 정치적 살인 때문이라는 게 다 드러났는데도, 그로 인해 서훈마저 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죽산은 그 법이 제정되기 9년 전인 1959년에 사형을 당했기에 ‘사형’이 소급 적용될 수도 없고, 죽산이 서훈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치탈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죽산은 해방 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임명으로 초대 농림장관이 돼 양곡제 매상과 공출제 폐지, 토지 개혁을 이끌었지요. 6·25 전쟁이 터지자 모두 피난을 가버려 국회가 텅 비어버리자 자신의 차에 가족들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싣고 남하했지요. 그 때문에 부인 김조 이씨가 강제 납북돼 행방불명됐어요. 자신보다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일하다 개인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분이지요.”

그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형이 확정된 사건은 다루지 않기로 했다지만, 죽산의 문제를 덮고선 과거사를 넘어설 수 없다고 믿기에 ‘규명’에 기대를 걸고 있다. “1956년 죽산이 ‘가칭 진보당’을 결성해 대선해 출마해 2백여만 표를 얻어 ‘이승만에게 투표엔 이기고 개표엔 졌다’는 얘기가 나오자 이승만 정권은 ‘60년 3·15선거’를 앞두고 ‘진보당 사건’을 만들어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진보당을 해체시켜버려 선거에 참여할 수 없게 했지요. 죽산은 1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되지 않아 징역 5년이 선고됐는데,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당장 판사를 요절내고 싶다’고 했고, 이 말이 떨어지지 무섭게 2심 판결을 앞두고, 반공 청년들이 법원을 난입한 사법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고, 2심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지요. 죽산이 재심을 청구했는데 59년 7월 30일 당시 퇴근시간이던 오후 5시에 ‘재심 사유가 없다’는 기각 통보를 하고, 다음날 오전 11시 자유당 정권의 법무부장관 홍진기의 재가로 사형이 집행됐지요. 마음 놓고 부정을 저지른 3·15부정선거의 서막은 이날 열린 것이지요.”

그는 죽산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아 논문집 일곱 권 발간을 위해 막바지 비지땀을 쏟고 있다. 죽산이 서훈을 받으면 곧바로 눈문집을 발간하고, 백지 묘비에도 부당한 독재자에 의해 굴절되기 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새겨 넣기 위해서다.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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