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와 가슴으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민중선교연대의 상임대표인 최정의팔 목사(57)를 만난 것은 26일 오후 서대문구 충정로2가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 있는 민중선교연대의 사무실에서였다. 그는 이날 종로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합동위령제에 참여했다가 오는 길이었다.
85년 노동자 빈민 위한 민중교회 연합“똥통에서 십자가 건진 문 목사” 효시투쟁에서 생명·사랑의 보루로
이날 인터뷰는 민중교회의 후신격인 생명선교연대 출범 20돌을 맞아서였지만, 그가 가장 먼저 내민 것은 병실에 누워 있는 한 이주노동자의 사진과 그의 애절한 사연이 실린 소식지였다. 방글라데시인 로빈씨(32)의 사진이었다. 심근경색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로빈씨는 지난 1일 1억여 원의 수술비만 남긴 채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고 한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왔다가 장가도 가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된 것도 억울한데 빚을 갚지 못해 로빈씨의 주검조차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쪽이 병원비를 최소경비인 4천3백만원으로 깎아줬고, 최 목사 등은 후원금 모금에 나서 애써 2천2백만 원을 모아 갚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1900만원을 여전히 갚지 못해 주검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달려온 로빈씨의 형은 이날도 동생의 주검이나마 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최정 목사에게 매달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지요?”
최정 목사가 답답한 심정을 기자에게 물었다. 그의 한 숨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로빈씨와 그의 형처럼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어온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실존적 고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젠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이 기장 선교교육원 건물은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등 진보적 민중신학자들이 후학들을 길러내던 곳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민중교회는 머리보다는 가슴의 울림으로 태동됐다.
“70년대 초 한강 뚝방의 천막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랑방교회를 철거반원들이 철거하면서 나무 십자가를 부러뜨려 똥통에 빠뜨렸지요. 이를 본 문익환 목사께서 똥통 안으로 뛰어 들어가 십자가를 부여안고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문 목사는 민초들의 삶은 모르는 전형적인 성서신학자일 뿐이었지요.”
최정 목사는 그런 민초들의 고통 받는 현장에 뛰어든 이주선, 조화선, 조지송, 정진동, 권호경, 허병섭, 이해학 목사 등이 노동자나 빈민들과 함께 한 교회들을 민중교회의 효시로 본다. 이런 민중교회들이 연합체로 출범한 것은 1985년. 이들은 늘 스스로 찢기고, 갇히면서도 반독재, 민주화와 인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보루였다.
최정 목사는 인터뷰 중 선교교육원 잔디밭 한쪽에 투쟁을 선동하는 걸개그림을 보고 “좀 생뚱맞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평생 투쟁의 야전을 누볐던 그가 아닌가. “세상은 변해가잖아요.”
1997년 민중교회연합을 생명선교연대로 바꾼 것도 변화의 흐름에 따라 투쟁보다는 생명에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려는 마음들이 모아진 결과였다. 종로 창신동 빈민촌에서 민중교회인 창암교회를 이끌던 그가 1996년부터 외국인노동자센터에 헌신해온 것도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한 약자의 호소에 부응한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변화를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면 안 될 처지였는지 모른다. 그의 아내는 전여자신학자협회 총무로 목회를 하고 있는 한국염 목사다. 그는 “29살에 결혼해 아이를 낳자마자 업고 교회에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성을 최씨에서 어머니 성까지 넣어 ‘최정’으로 한 것은 “그저 좋아서”라고 했다. 그는 민중교회와 함께 한 삶도 “좋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최정 목사는 늘 고뇌했고, 부딪히고, 깨지기도 했지만 좋았던 생명선교연대의 지난날을 회고하고, 내일을 전망하는 국제심포지움을 31일 오후 4시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장공채플실에서 열고, 오후 6시엔 20돌 기념식과 기념문집 출간회에서 동료들과 공연과 굿판을 펼칠 계획이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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