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한반도 평화 위한 ‘사랑의 채찍질‘ 깊이 새겨야
이땅에서 ‘그리스도교’(가톨릭+개신교)는 근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한신대와 가톨릭대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과제로 채택된 이 주제를 놓고 지난 3년에 걸친 연구를 마쳤다. 연구 책임자인 김경재 전 학술원장과 박일영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장이 지난 23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좌담회를 했다. 두 신학자는 가톨릭 220년, 개신교 120년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다.
-왜 이처럼 방대한 연구를 했나.
김경재==20세기 이후 그리스도교를 빼고 한국 사회를 얘기할 수 있는가. 요즘 개신교가 워낙 신뢰를 얻지 못하다보니, 동아시아의 문명과 서구문명의 핵심인 그리스도교가 만나서 일으킨 심층적인 변화를 도외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런 연구가 없었나.
박일영==가톨릭 교회 내부의 연구와 논의도 ‘우리만 잘났다’고 하는데 그치고 한국 사회와 소통이 부족했다.
-그리스도교의 전래가 이 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박일영=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를 세계 공동체로 편입시킨데 큰 역할을 했다. 쇄국주의를 넘어 세계와 교류를 통로를 열었다.
김경재=그리스도교가 점차 상류층, 중인, 서민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는가. 이들의 시민사회운동이 지난 200년간 그리스도교가 한국사회 속에서 개개인의 존엄성과 가치, 사회의 연대성, 정의에 대해 꾸준히 교육하고, 투쟁했다. 이들의 희생, 고난없이 오늘의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가 하루 아침에 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교 인구가 1%도 안 되는 이웃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어떻게 동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그리스도교가 정착할 수 있었나?
전통과 갈등·냉전 고수 개신교 비판 많아
김경재=근대에 민중들은 유교와 같은 전통 종교에서 혜택을 본 적이 없다. 억압과 굴레와 권위주의의 희생자들이었다. 전통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 기류를 타고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다. 대체적으로 개신교는 중하위 민중들에게 전래됐다. 민중들은 그리스도교를 신분적 해방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가톨릭은 초기에 지식인들이 먼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박일영=가톨릭은 조선 후기 남인 계통의 학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다 서학을 발견해 신앙이 됐다. 가톨릭이 제사를 거부하자 유학자였던 남인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김범모 같은 중인들이 채웠다. 박해시대엔 한국 가톨릭의 주도자들이 서민으로 바뀌었다.
-이 땅에 초기 전래되며 가톨릭은 1만 명 이상의 순교자가 발생했지만 1960년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통을 점차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개신교는 여전히 전통종교나 문화와 갈등 양상 아닌가.
김경재=개신교에선 한국 전통의 풍성한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다. 최병현, 유영모, 김재준, 함석헌 등 10여분 정도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인가.
김경재=서양 초기 선교사들이 아시아 종교문화를 이해하기엔 너무 젊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초기 선교사들도 20대 후반에 불과했다. 선교적 열정이 강하고, 의료, 교육 등엔 큰 공헌을 했지만, 아시아의 문화를 접목해서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전통문화에 폐쇄적이고 파괴적이고 정복적인 그들의 행태가 고착화돼 그것을 고치려니 힘들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개신교는 모른다. 그러니 더욱 힘들다.
박일영=초창기에 유학의 전통에서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50~60년 지나 주도권을 잡은 프랑스 선교사들은 여유 있게 문화를 이해하고, 교류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여론조사 기관에 맡겨 여러 차례 조사도 했는데, 그 결과는.
박일영=가톨릭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선 초기 100년은 사회복지의 종교로, 후기 100년은 사회 정의의 종교로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종교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김경재=개신교는 개화기로 보는 19세기 말부터 3·1운동 때까지 개화의 도구로서 의료, 교육, 인권 분야와 민주화 과정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로 너무 비대해졌다는 것을 지적해 체중감량 요구가 컸다. 자본주의 논리에 흡수당해 교회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오늘날 문화적 다양성이 만개한 지구촌 시대에 너무 독선적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기독교인들 빼고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전통문화와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을 아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개신교 안에도 신자들보다는 지도자들이 배타적이지, 그렇게 세뇌를 당한 극보수교단 신자들 외엔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다. 정신문화적으로 외톨이가 되면 결국 전멸하고 말 것이니 개신교 밖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하라는 요구가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다. 앞으론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을 요청했다.
박일영=가톨릭 조사에서도 ‘가톨릭의 할일이 뭐냐’는 질문에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역할 해야 한다’는 답변이 많았다.
-그렇지만 남북간 화해를 가장 거부하고 있는 게 그리스도교쪽 아닌가.
김경재=오히려 먹물들이 오해하고 있다. 나 자신도 시청 앞 친미 반공적 집단 행태를 보고, 한국 개신교의 70~80%가 동조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막상 여론조사를 해보니, 동조자는 많아봤자 30~40%이고, 60% 이상은 좀 더 유연하게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이 냉전을 고수하는 이유는 뭔가?
일제 때 가톨릭, 민중에 등돌린 점 없잖아
김경재=해방 이후 냉전체제의 희생물이 되면서 초기 북한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몰이해하며 종교를 파괴했다. 핍박받던 이들이 남하함으로써 반공주의의 씨앗이 되고, 이들이 친미로 기울고 갈등의 논리를 키웠다.
-그리스도교는 때론 민족에 등을 돌리고, 때론 민족과 함께 했다. 가톨릭의 경우 안중근 의사를 가톨릭 신자로 인정치 않았고, 3·1운동 민족대표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일제 때 민족에 등을 돌린 것은 아닌가.
박일영=한국 가톨릭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도하면서 정치 불간섭주의를 채택했다. 그래서 해방운동과 독립운동에 부정적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일기엔 3·1운동 당시 신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해 걱정이 크다는 내용이 들어있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돕다가 본국으로 소환을 당했다. 그러나 개신교나 천도교처럼 전 교회적으로 참여를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김경재=미국은 정치적 결탁으로 조선을 일본에 맡기기로 했다. 교권주의자들은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정치 불간섭 원칙대로 독립운동을 금했지만, 절반 정도의 선교사들은 조선 민중을 위해 이를 허용했다.
-세계적 분쟁과 테러의 이면엔 종교 갈등이 자리 잡고 있지만, 한국에선 종교 간엔 비교적 화해를 이루고 있는 것 아닌가.
박일영=국민의 25%가 그리스도교인이다. 한반도야말로 세계 문명이 공존할 수 있느냐, 충돌할 수 밖에 없느냐의 시험대다.
김경재=세계 학계에서 10년 전만해도 종교 화약고로 한반도를 꼽았다. 지금은 바뀌어 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떠올랐다. 일부 개신교의 배타적, 정복적인 모습은 앞으로는 교회 안에서도 지지를 받지 어려울 것이다.
정리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