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가 꽃을 피우고,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가 만개했다. 다시 200여년 전부터는 가톨릭이 들어와 바티칸이 주목할 만큼 자리를 잡았고, 120년부터는 개신교가 들어와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성장을 이뤘다. 근현대 민족의 수난기에 왜소해진 천도교와 증산도 계통의 민족 종교와 원불교 등 자생 종교, 50여개의 예배처소를 갖춘 이슬람까지.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종교박물관이다. 미주와 유럽의 나라들에선 기독교가, 아시아의 나라들에선 가톨릭 국가나 다름 없는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불교나 이슬람이 각각 지배 종교로 군림하고 있다. 그나마 인도가 힌두교와 무슬림과 기타종교가 8:1:1 정도의 비율을 보일 뿐 주요 종교들이 우리나라처럼 군웅할거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렇게 외부에서 종교나 사상이 들어오는 대로 이 땅에 정착한 데 대해 원불교 3대 종법사(최고지도자)였던 대산 종사(1914~98)에게 한 방문객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줏대가 없어서 쉽게 동화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대산 종사는 “우리 민족의 마음은 어느 곡식을 심어도 잘 자라는 기름진 옥토와 같다”며 민족심성론으로 답하기도 했다.
대산 종사의 말처럼 한국인의 심성 때문인지 많은 종교가 부대끼면서도 종교로 인한 전쟁과 테러는 없다. 유대인과 이슬람이 대치하는 팔레스타인, 힌두와 무슬림이 대치하는 카슈미르 등 세계 분쟁과 전쟁 원인의 절반 이상이 종교 때문임을 본다면 한국 종교들의 모습은 독보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개신교인들이 단군상을 파괴하거나 사찰에 불을 지르는 등 갈등 요인이 잠복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개신교인들도 배타성보다는 화해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일제 치하에서 각 종교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3·1만세운동을 이끈바 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개신교, 천도교, 불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현대에 들어 강원용 목사가 1965년 대화문화아카데미를 열어 6대 종단 지도자를 초청해 종교 간 대화를 시작했다. 2003년엔 가톨릭의 문규현 신부, 불교의 수경 스님, 개신교의 이희운 목사, 원불교의 김경일 교무 등 종교인들이 함께 전북 부안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보1배로 새만금갯벌 살리기에 나서기도 했다. 한 사회 안에서 반목과 갈등을 야기하기보다는 공동체 성원으로서 서로 협력하며, 우리 사회 공동선을 위해 노력해온 것이다.
조연현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