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명동 집단이주민촌 출신
독립운동·옥고·월남·교회 개척…
아들 문익환·동환씨 딸들이 내
문재린 목사·부인 김신묵씨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삼인 펴냄)은 문재린(1896~1985) 목사와 그의 부인 김신묵(1895~1990)씨의 어릴 적 이름을 딴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보다 문익환·문동환 목사의 부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문재린은 “남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없어, 쓰다가 붓을 던져 버리곤 했다”고 썼지만, 그의 회고록은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만한 한 집안의 문중사만은 아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평한 대로 민족사와 정치사, 사회사, 교육사, 여성사, 교회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난 문재린은 네 살 때 4가문 25가구의 집단 이주민의 일원으로 북간도 명동으로 이주했다. 훗날 부인이 된 김신묵도 함께였다. 명동촌은 암울한 시절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키워낸 요람이었다. 그 마을을 이끌던 조선의 실학자들이 기독교를 접하는 과정을 보면, 개신교 선교 초기였던 100여년 전 개신교인들의 모습이 잡힐 듯 그려져 있다.
그곳에선 명동학교와 함께 명동교회가 조선인들의 구심점이었다. 1910년 명동교회에서 학교 직원과 학생들 10여명과 함께 문 목사와 부친, 할아버지 3대가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문재린이 평생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동만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약연 선생(목사)이었다. 그런데 김 선생은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엄격하기 그지 없던 그는 겨우 몇 달 배운 것 가지고 교리를 어찌 알겠느냐면서 시험격인 세례문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훗날 문재린의 장인이 되는 김하규 선생은 주역이나 맹자, 장자, 불경까지 읽었는데, 누가 권한다고 믿을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김약연 선생조차도 전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남몰래 3~4년 동안 성서를 세 번 통독하고 스스로 교회에 나왔다. 김약연 선생이 그 까닭을 물으니 “유교에서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길이 없다고 했는데 기독교에는 속죄의 도리가 있음을 보니 과연 천도(天道)라 입문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재린은 올곧았던 명동촌 어른들의 가르침과 일제의 핍박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민족 정신과 신앙을 길렀고,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를 거쳐 캐나다로 유학해 목사와 민족지도자의 기틀을 다졌다. 일제와 해방 정국에서 네 차례 옥고를 치른 그는 1946년 남한으로 내려와서도 조국과 신앙에 헌신했고, 65살로 은퇴한 뒤엔 평신도 운동에 전념했다.
김신묵은 교회와 야학에서 여성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시할머니, 시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자녀들을 남달리 키워냈다. 남한에서는 남편과 함께 한빛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1990년 “나 죽거든 박수치며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기를 기증하며 떠났고, 수감 중이던 문익환 목사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유언대로 춤을 추며 보냈다. 이 책은 문익환 목사의 딸인 문영금씨와 문동환 목사의 딸인 문영미씨가 함께 엮었다.
책 출판기념회가 23일 오후 6시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다.(02)3499-7500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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