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탄생 100돌 맞아 전기 출간
“나는 누구인가?/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나는 누구인가?/…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나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나치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남긴 <나는 누구인가?>란 시에서 목사와 신학자이기에 앞서 진솔한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본회퍼 탄생 100돌을 맞아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전기 <디트리히 본회퍼>(복있는사람 펴냄)에 소개된 시다.
본회퍼는 불의와 싸우던 현대인들에게 지대한 용기의 성소였다. 한명숙 총리는 남편 박성준 교수가 무기징역형으로 복역 중이던 1979년 자신도 ‘크리스천 아카데미사건’으로 구속돼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생각하다 본회퍼 옥중서간집에 나오는 다음의 글귀를 보고 ‘구원’을 얻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문익환 목사도 본회퍼로부터 큰 용기를 얻어 ‘한국의 본회퍼’가 되었다.
본회퍼는 독일 브레슬라우의 유복하고 전통 있는 가문에서 팔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본가와 외가는 대부분이 독일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이거나 판사 등이었다. 본회퍼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형제들과 자주 협연한 음악 애호가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불과 스물한살에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스물세살에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한 천재 신학자였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직전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미국의 친구들은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그가 미국에 남을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불의에 싸인 조국의 모습을 방치할 수 없어 기어코 귀국을 감행했다. 전쟁에 몰두하는 히틀러 치하에서 누구도 평화를 입밖에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평화를 힘차게 외쳤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틀 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지도자가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해 국민을 현혹하고, 국민이 그에게서 우상을 기대하면, 그 지도자상은 조만간 악마의 상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제 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폭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면, 그 폭주를 멈추게 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며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했다. 하지만 수감 중에도 그는 늘 시종일관 타자를 위한 사랑의 삶으로 일관했다. 본회퍼는 1943년 4월5일 체포돼 갖은 고초를 치르다 히틀러가 항복을 선언하고 자살하기 보름전인 1945년 4월 9일 서른아홉살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제게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고백했다.
이 책을 번역한 여수 돌산 갈릴리교회 김순현목사는 “그는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갔지만, 온갖 종류의 억압과 차별이 있는 곳, 전쟁을 부추기는 곳, 종교적 획일화가 획책 되는 곳, 종교 장사꾼들이 판을 치는 곳, 그리스도를 본받는 값비싼 제자의 길을 역설하지 않고 싸구려 은혜만을 팔아 자기 배를 불리는 장사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정신은 ‘빛나는 고난’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한다”고 했다. 50여장의 화보가 생생함을 더해 준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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