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 연구소장 종림 스님 /
서울 인사동 골목이나 안암동 개운사 골목에서 승복을 입었지만, 도무지 스님 같지 않고, 어수룩해 보이며, 말 또한 어눌한데도 어딘가에서 더운 여름 찬 우물 같은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를 만난다면, 그가 바로 종림(62) 스님이다.
기자가 그를 처음으로 눈여겨본 것은 4~5년쯤 전이었다. 서울 조계사에서 ‘간화선 토론회’가 열렸는데, 토론회가 끝난 직후 토론자로 그와 도법 스님을 비롯한 10여명이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처 못다한 토론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엔 스님들뿐 아니라 수십명의 방청객과 기자들까지 대거 함께했다. 스님들만이 아니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이 함께한 야단법석이 펼쳐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림 스님은 허리춤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맥주까지 한 잔 시원스레 들이켜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스님들 중엔 곡차를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중들의 안목이란 겉모습 하나만으로 사람 전체를 재단하는 겉볼안인 때가 많은지라 알 만한 사람들끼리의 자리가 아닌 대중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굳이 책잡힐 짓을 하지 않는 게 상식이 아니던가. 그래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느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당연지사가 된 세상에서 대중의 눈치에 아랑곳없이 담배를 물고 털끝만한 꺼림이 없이 할 얘기를 해가는 모습이 오히려 한줄기 청풍으로 느껴진 것이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고려대장경 1514종의 경전, 16만쪽·5천여만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10년의 노력 끝에 지난 2000년까지 시디 15장에 담아낸 고려대장경 연구소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수명이 다해가던 목판에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부터 한국 불교계를 정화하려던 개혁 세력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나름의 불교관과 철학관을 가진 그지만 겉모습에선 새털만큼의 무게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정도로 겉모습엔 신경을 쓰지 않는 그다. 해병대보다 군기가 세다는 해인사도 무욕의 그를 묶지는 못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그를 아끼는 도반들이 “남 있는 곳에서 담배 좀 안 피울 수 없느냐”고 하면, “큰스님이나 주지는 느그들이나 하고, 나는 그런 거 할 생각 없으니, 담배 피우는 건 내버려 달라”며 태평스레 담배를 물었던 그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사는 방엔 언제나 밤새 읽어 머리를 깨끗이 비우게 한 만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컴퓨터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던 80년대 초부터 산사에서 밤새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너무도 방대한 작업이어서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성공시킨 것은 그가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접했던 만화의 상상력과 그의 장난감인 컴퓨터가 빚어낸 조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술, 담배, 커피, 만화, 컴퓨터 게임…. 스님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것만을 접하는 그와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고려대장경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연구원 가운데 무려 7명이 그를 따라 출가해 머리를 깎았고, 어수룩하게만 보이는 그를 가수 김수철과 연세대 교수 이규갑, 김사인 시인, 김형태 변호사, 호미 출판사 홍현숙 대표, 시인 이문재씨 등이 그토록 ‘죽고 못사는’ 이유가 뭘까.
종교인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자기 포장’에 익숙한 세상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심판과 가르침만 많은 세상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넉넉한 미소로 귀를 밤새 열어두는 그를 지인들은 ‘우리 할배’라고 한다.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고마운 내 친구들 술 담배 커피 만화 컴퓨터게임 덕에 즐겁소
‘고려대장경 전산화’ 종림 스님의 사는 법
종림 스님은 지식인으로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수행자와는 더욱 더거리가 멀어 보인다. 편안한 할아버지나 아저씨처럼 느껴질 뿐이다. 무엇엔가 열정과 신념을 가질 것 같지도 않은 그가 어떻게 고려대장경연구소장으로서 불교사의 대역사를 이뤄낸 것일까.
먹고 살거나 출세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거나,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애초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다니던 시절 도서관은 그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학교 수업도 늘 빼먹기 일쑤였던 그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헤겔과 칸트, 장자, 노자를 읽었다. 고향인 경남 함양 안의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상계〉를 정기 구독해 읽었을 만큼 일찍이 철학과 종교 사상에 눈을 떴던 그였다. 어린 시절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들렀던 자기 집 사랑방에서 본 세상 사람들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는 그렇게 책에 푹 파묻혀 살았다.
성현들은 철학과 종교를 통해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살아가는 자들의 상황 논리와 그 원칙 사이엔 갭이 있었다. 그는 우주와 인간, 물질과 정신의 지도를 만들어 모든 사람이 그 갭을 쉽게 뛰어넘도록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다.
그가 군대를 다녀와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속가에선 놀라지도 않았다. 일찍부터 그는 부모에게 세상에서 밥 벌어먹고 살 만한 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출가한 뒤 선방 좌선 7년만에 사람도 길도 없는 ‘무’ 체험틀 얽매이지 않는 ‘산소탱크’로…고려대장경 연구소장 10년만에 750년 잠자던 대장경 시디로 깨워
그는 ‘해인사 호랑이’였던 지관 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친 그가 간 곳은 선방이었다. 하기 싫은 일을 누가 시켜서 한다고 할 리 없는 그가 무려 6~7년간 선방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는 것은 스스로 근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사람도 살 수 없고, 길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無)의 체험이었다. 그를 붙잡던 이념도 감정의 찌꺼기들도 사라졌다. 그는 그때 “이제 ‘종림이’를 아무데나 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뒤 그는 1년간 전남 해남 대흥사 선방에서 선원장을 지낸 것 외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삶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구름과 물처럼 떠돈다는 뜻으로 ‘운수단’(雲水壇)이란 이름을 붙인 봉고차에 코펠과 버너를 싣고 다니면서 산하를 주유하는가 하면, 경남 함양 서상면에 손수 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선방에서 살 때도 도무지 수좌(선승)로서 틀도 싫어해 ‘비수좌’로 불렸던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삶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뿐 아니라 틀을 벗어난 자에게서만 보이는 심미안에 반하기 시작했다. 그가 함양 산골 개울 옆에 나무를 직접 베어 오고 돌과 흙을 짊어다가 삼각형으로 지은 집은 건축 전문가들도 도저히 아마추어가 지은 집이라곤 믿어지지 않는다며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도 쓸모 있었다.
특히 고정된 틀을 유지해온 불교계에서 그의 독특한 삶과 자유로운 안목은 훗날 조계종 개혁의 산실이 된 대승불교승가회 등의 모임에서 산소탱크로 기능했다. 또 해인사 소식지였던 〈해인〉은 그가 편집장을 하면서 산사와 대중들의 소통의 장으로 변했고, 80년대 그가 해인사 도서관장을 맡자 일만오천권의 도서관 장서가 컴퓨터로 분류되고 대장경 목록이 만들어졌으며 드디어 대장경 전산화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의 곁엔 늘 몇 잔의 술과 담배, 커피, 만화가 함께했다. 종림 스님은 그들을 “고마운 내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자들의 외로움을 가끔씩 달래주면서도 늘 숨겨둔 첩마냥 천대받는 그것들도 모처럼 제 대접을 해주는 종림 스님을 ‘우리 할배’라며 고마워할지 모른다.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인들이 말하는 종림스님말없이 들어주고 안아주는 ‘삶의 오아시스’
지난달 30일 밤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작은 한정식집 ‘예가’. 종림 스님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가수 김수철씨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김씨가 몇년 전 이혼 뒤 허망하게 한강 둔치 벤치에 앉아 망연자실하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캔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그 옆에 말 없이 앉아 함께 한강을 바라봐 준 이가 종림 스님이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곳에서 종림 스님은 온갖 물들을 남김없이 받아주는 바다처럼 앉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종림 스님이 고려대장경을 전산화하려고 서울 이태원에 방을 얻어 기거하다 안암동으로 온 지금까지 그의 방엔 그의 중차대한 업무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이들이 늘 사랑방처럼 찾아들곤 했다. 그는 어린 후배 스님들이 그의 방에 찾아와 몇 날 며칠 동안 뒹굴며 이불 한 번 개지 않고, 양말을 벗어 팽개쳐두고 가도 말 없이 빨아 자신이 챙겨 신곤 했다. 후배들이 “영감, 영감” 하며 엉겨도, 그저 바다처럼 안아주었고, 오히려 예의를 차려 큰절을 할라치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종림 스님과 지난해 파키스탄부터 중국 서부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을 했던 이규갑 연세대 중문과 교수는 언제나 종림 스님과 한방을 쓰고 싶어 했다. 종림 스님은 새벽에 일어나 포행을 다녀오면서도, 이 교수가 늦잠을 늘어지게 자도 스케줄에 지장이 없는 한 한마디 책을 잡는 법이 없고, 무려 보름 동안 사막을 횡단하느라 동승한 여행객들이 지루하고 힘들다며 몸을 비틀고 불만을 토로해도 언제나 한결같이 미소가 샘솟는 오아시스로 남아 있었다.
“스님도 화날 때 있으세요?”
1980년 말 종림 스님이 이끌던 〈해인〉의 편집 디자인을 맡으면서부터 그를 알게 된 호미출판사 홍현숙 대표가 슬며시 물었다. 30년 넘게 지켜봐도 도무지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하는 소리였다.
“나도 가끔 짜증난다.”
그의 순진무구한 답변에 다시 웃음이 쏟아진다. 예가 주인 나경희씨는 대학 시절 기도하러 친구들과 함께 해인사에 다닐 때 그를 처음 보았다. “수좌 스님(선승)들이 좋아하는 스님이 홍제암에 계시다는데, 우리도 뵈러 가자”는 친구들을 따라갔다가 열어진 방문 틈으로 태평스럽게 담배를 물고 있는 종림 스님을 보고 너무 놀라 “절에서 담배 피는 스님이 무슨 스님이냐”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 나왔다. 그 뒤 스님들로부터 “너는 겉만 번지르르한 스님들에게나 가보라”는 핀잔을 들은 나씨는 몇 년 뒤 다시 친구들과 함께 경남 함양의 종림 스님 토굴을 찾았다. 그랬더니 더욱 가관이었다. 집 마당엔 밤하늘을 보는 커다란 천체망원경이 있고, 방안에 들어가 보니, 방엔 만화가 가득 쌓인 가운데서 그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지금은 나씨뿐 아니라 그의 남편도 간과 쓸개까지 햇살 아래 투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천진함에 반해버렸다. 인사동에서 식당문을 닫은 나씨가 이곳에 다시 식당을 차리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남편도 종림 스님이 “하게 둬라 마. 집에 있으면 아 병난다”는 얘기에 두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남편이지만, 도무지 남의 책잡을 얘기는커녕 조언도 하지 않는 종림 스님의 한마디에 그대로 수긍했던 것이다.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