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로서 선(禪)을 체득해 대자유의 삶을 누린 중국의 두 기인 소동파와 방(온)거사에 대한 책이 동시에 나왔다. 당송팔대가의 한명으로 대문호인 소동파는 선어록에 수록될 정도로 임제종의 선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도 자신을 ‘불교 재가자’를 일컫는 거사(居士)라고 했다. 방거사는 부처 당시 문수보살과 일합을 겨룬 유마거사를 빗대 중국의 유마거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화두선을 주창한 대혜 선사가 <서장>에서 “다만 온갖 있는 것들을 비우기를 원하고, 결코 없는 것들을 채우지는 말라”는 거사의 임종게(임종할 때 남긴 시)를 인용해 “다만 이 두 글귀만 알면 일생 참선하는 일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 극찬한 대선사다.
■ <소동파,선을 말하다> “다정이 바로 부처의 마음”
소동파는 문장·시·서예·회화·유학·요리 등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최고 수준의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그처럼 다재다능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좌천과 유배로 보냈다. 그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았으며,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도 않고 자기연민에도 빠지지않은채 채 의연하게 살아갔다고 한다. 그가 척박한 유배지에서 낙천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세속적 가치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이 원동력이 됐다.
소동파가 남방의 유배지에서 돌아와 양선에 거주하려고 했으나 돈이 없었다. 이를 안 친구가 백방으로 노력해 집을 구해주었고, 소동파는 전재산을 집값으로 지불했다. 어느 날 소동파가 산책을 하는데, 길가의 어느 집에서 늙은 부인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늙은이는 불효자식이 대대로 내려온 집을 팔아버려서 자신의 거처조차 없어지자 울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소동파는 집계약서를 가져와 즉석에서 불태웠다. 그리고 지불한 집값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불교학자인 저자 스야후이는 “다정(多情)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는 시로 소동파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학문과 선에만 달통했던 게 아니라 동파육, 동파병 등 100가지에 달하는 요리까지 개발했던 대천재의 삶이 바람처럼 달빛처럼 살갗에 다가선다. 김영사 펴냄, 장연 옮김.
■ <방거사어록강설> “재물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방거사는 형양 태수의 아들이었는데, 과거를 보러가던 중 벼슬길에 오르는 것보다 부처가 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귀로에 올랐다. 그는 수만 수레에 이르는 집안의 재산을 배에 싣고 상강에 가져가 전부 물 속에 가라앉혀 버리고, 성 밖의 작은 집을 장만해 대바구니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전한다.
그가 재물을 던지려 할 때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든지, 불사에 쓰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방거사는 “내가 이미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버리면서 어찌 다른 사람에게 주랴, 재물은 심신을 괴롭히는 근원이다”며 단호히 물 속에 던져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중하게 여기지만/나는 순간의 고요함을 귀하게 여긴다/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고요함은 진여의 성품을 나타낸다.’
방거사의 게송엔 무소유의 성품이 드러난다. 또한 방거사 일가족이 열반하는 장면은 도인가족의 자유자재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방거사가 스스로 열반할 때가 됐음을 알고 딸 영조를 불러 자신이 열반할 것임을 전하고 “잠시 나가서 해의 높이를 보아 두어라, 오시가 되거든 알려다오”했다. 영조가 문 밖을 나서자마자 “잠깐 나와 보라”고 아버지를 불렀다. 방거사가 창가로 와 해를 살피는 도중 영조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채 그대로 몸을 벗어버렸다. 방거사는 이를 보고 “딸 녀석이 꽤 민첩하구나”라며 웃었다. 거사도 딸을 화장한 뒤 앉은 채 열반했고, 밭에서 일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그대로 서서 열반했다.
‘선우도량’ 공동대표와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혜담지상 스님이 방거사 사후 1200년을 2년 앞두고 선종 본래의 선풍을 되살려는 서원으로 이를 강설했다고 한다. 불광출판사 펴냄.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