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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휘영청 달 밝거든 청산네 놀러오소

등록 2006-10-24 19:48

칠보산 자락 한옥 지은 정순오·나미희씨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칠보산 자락에 가면 ‘청산’(靑山)이 한옥에서 놀고 있다. 괴산 사람들에겐 ‘청산’이란 호칭으로 더 알려진 정순오(43)씨가 이곳에 정착한 지 3년이 지났다. 청산은 서울 혜화동에서 헐린 한옥 자재를 먼저 옮겨놓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독학한 실력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까마귀까지 불러서 잔을 권할 만큼 벗을 좋아하는 그가 머무니 이곳엔 인적이 끊일 리 없었다. 전문 건축업자도 부르지 않은 채 거의 혼자 집을 짓겠다고 나섰으면서도, 청산은 기둥은 언제 세우고, 구들장은 언제까지 놓겠다며 열성적으로 땀을 흘리는 것 같지도 않고, 일이 힘들다며 총총걸음을 옮기는 법도 없었다. 안달복달하기는커녕 그저 밤이면 벗들과 달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커니 잣거니 하며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새 옛 대가만큼이나 그럴듯한 ㄱ 자 한옥이 들어선 것이다. 늘 ‘놀고 있는’ 청산만을 본 마을 사람들에게도 잡초만 무성했던 산기슭 밭에 커다란 한옥이 지어진 것은 신비한 일이었다.

“청산은 늘 놀면서, 춤추면서 일해요. 그래서 실은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지요.”

청산이 ‘달마당’이라고 부르는 3년 연상의 아내 나미희(46)씨의 말대로 청산은 늘 일을 놀이처럼 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넘어 일을 즐긴다는 것이다. 청산이 워낙 기쁘게 일하다 보니, 아내뿐 아니라 딸 다린(10)이, 아들 다빈(8)이까지 아빠와 놀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집 짓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가 집을 짓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고 축제였다. 외지의 벗들이 찾아와 그와 놀면서 일을 거들었고, 귀농운동본부 생태건축팀에서도 20여명이 3박4일씩 와서 집짓기 놀이를 함께 했다. 무전여행 중이던 한 가톨릭 수도사도 최근 닷새 동안 청산과 막걸리를 마셔가며 김치보관용 암굴을 만드는 일을 하고 떠나면서 “잘 놀고 간다”고 했다.

이 산골의 500여 평에 이렇게 그럴듯하게 지어진 한옥을 처음 본 사람은 청산이 꽤 돈 많은 사람일 거라고 짐작하기 마련이다. 양옥보다 한옥이 건축비만도 서너배 더 드는 판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한옥은 돈으로 지은 게 아니었다. 실제 양옥 건축비만큼도 들지 않은 것은 많은 재료들을 주워다 쓰기도 했지만, 이렇게 그와 벗들이 인부를 사지 않고 손수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까지 한 가족 다섯 명이 살기엔 ‘터무니없이’ 커보일 만큼 집을 크게 지은 것도 이곳에서 벗들과 잘 놀기 위해서다.

청산은 자기가 지은 집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징검돌’이라고 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경기도 포천 광릉수목원 쪽 ‘문화의 거리’에서 어머니, 아내와 함께 한정식을 팔면서 서예교실, 태껸교실 등을 열고 시낭송회와 공연도 하는 ‘문화공간 민들레울’을 7년 동안 꾸렸던 그였다. 이 집 마당에서도 벌써 호주에 사는 남동생의 전통혼례식도 올렸고, 시낭송회도 했다. 또 다음달부터는 달이 휘영청 떠오르는 보름날 밤마다 자기 집에 있는 음식 한가지씩을 들고 모여 놀기로 했다.

청산이란 이름은 그가 옛시의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 인간 이르는 곳마다 모두 청산일세)란 구절을 보고 따온 것이다. 그가 가는 곳이 바로 청산이요, 그가 이르는 곳이 놀이터다.

괴산/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남들은 “그 나이에?”라지만, 그이 발소리에 지금도 두근…

‘청산’과 ‘달마당’의 부부연가 /

남편이 시골살이를 원해도 아내가 호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아무래도 편리한 도시에 비해 시골에서 살림하는 여자들이 감수해야 할 불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달마당은 청산보다 오히려 더 시골살이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역시 청산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삶은 꿈도 꾸지 않은 전형적인 도시처녀였다. 연하남은 안중에도 없었고, 청산처럼 수염을 기르고 도사처럼 보이는 사람은 더더욱 “밥맛 없어” 했다. 대한항공의 실업탁구단 선수로 활약하다 대한항공에서 근무했던 그는 직장 한 번 가져본 적이 없는 남자와 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달마당이 청산을 만난 것은 회사를 그만두고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찻집을 의정부에서 운영하던 때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군대를 마친 청산은 포천의 빈집을 빌려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었다. 청산은 가진 것 하나 없는데도 늘 사람이 꼬였다. 청산의 집 마당엔 낮엔 동네 아이들이 와서 들꽃을 꺾어 청산 방에 꽂아놓고 놀다 갔고, 밤이면 마을 처녀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청산이 친구들과 모처럼 의정부 시내에 나갔다가 찻집을 찾았다. 달마당은 그때 찻집을 들어서는 청산을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석 같은 게 그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달마당은 “저렇게 때 묻지 않은 사람과 같이 산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1993년 그와 결혼한 뒤 지금까지도 멀리서 들려오는 청산의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설레는 두근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항공사 탁구선수 출신 도시처녀 첫눈에 가슴 덜컥 연하남에 빠져…결혼 14년째도 밤새도록 얘기꽃…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 유유자적

그래서 포천 민들레울에 이어 이곳까지 잔치 같은 생활을 이어왔다. 요즘도 청산과 달마당은 벗들이 찾지 않은 밤에도 단둘이 대청마루에 앉아 술과 차를 마시면서 얘기꽃으로 날을 지새우기도 한다. 달마당과는 정반대로, 이제 남편 발소리만으로도 싫은 생각에 두근거린다는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남편으로 인해 가슴이 떨린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 “미쳤다”고 야단이다. 둘은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라고 쓰인 나무 푯말 옆에서 세상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찻잔을 나눈다. 달빛에 반짝이는 두 눈빛이 말하고 있다. “누가 이 맛을 알랴”고.

글 조연현 기자 cho@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청산네가 꿈꾸는 이웃공동체 “아이들에게 고향 만들어 주고파”

청산 집 방문자들의 관심사 중 하나는 다섯식구가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것이다. 손가락만 빨고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가진 돈도 집을 짓느라 모두 썼다. 먹을거리는 1천여 평의 밭과 텃밭에서 가꾼 푸성귀들과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거의 해결한다. 또 산골 한옥에서 소리공부를 하려는 소리꾼들이 민박을 하기도 하고, 대안학교 학생들이 염색도 하고, 농사도 해보고, 칠보산도 오르기 위해 체험여행을 오기도 한다. 포천에서 한정식집을 할 때 주방을 맡아 명성을 떨친 청산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천연염색한 옷까지 입어본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달마당은 염색 솜씨를 살려 선물용 공예품도 만들 준비도 하고 있다.

그렇게 근근이 살림을 해간다 하더라도 물질적 풍족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청산은 다린이와 다빈이에게 고향을 만들어주는 것만큼 아이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3년 동안 집짓느라 늘 공사 중이었기에 아이들을 위해 공부방과 친구들이 있는 증평 도안면에 집을 얻어 두 집 살림을 했다. 그런데 주말이나 일찍 하교할 때면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에 와 놀며 일을 거들던 다린이와 다빈이는 어서 빨리 시골집서 살고 싶다고 성화다.

원래 이곳에 살던 누나 부부와 함께 가족공동체를 이뤄 고향을 만들고 싶었던 꿈은 누나네가 매형의 사업 때문에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지만, 청산은 그 뒤 더 넓은 이웃공동체를 꿈꾸게 되었다.

수입 없이 근근이 꾸리는 살림, 텃밭 가꿔 먹고 염색공예품 채비“자연·이웃 어울려 살 때 더 풍요”

“시골이라고 농사짓는 사람만 살 게 아니라 선생님과 집배원과 예술가가 살고, 노인만 아니라 청년들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게 좋지요. 그래야 삶의 얘기들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고향마을이 될 테니까요.”

서울 토박이 청산이 자연과 이웃과 어우러진 고향을 칠보산 자락에 만들어가고 있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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