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틀 넘어 내년 학술회의
“참된 부흥은 자기 변화로부터…”
성경으로 돌아가 화해 시도
“시대는 달라졌다.” “신학은 고정돼 있지 않다. 신학도 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마음은 열릴수록 고개를 숙이고, 상대에게 다가서기 마련이다.”
현대사에서 진보-보수의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곳 가운데 하나였던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손을 잡았다. 우리나라 성서학계를 대표하는 진보 쪽의 한국구약학회와 한국신약학회, 보수 쪽의 한국복음주의구약학회와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의 임원들은 13일 낮 서울 한국언론회관에 함께 나와 지금까지 그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온 ‘반목의 언어’가 아니라 ‘화해의 언어’를 쏟아냈다.
내년 5월 25~26일 이들 단체가 공동으로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에서 열 ‘평양대부흥 100돌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6개월 전부터 만남을 가져온 이들은 ‘평양대부흥 100돌’을 맞아 진보-보수 성서학계가 손을 잡고 한국 교회 변화의 초석을 놓겠다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국내 성서학자들은 모두 800명으로 단일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한국 교회 뿐 아니라 세계 신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모다. 그러나 이들이 진보-보수의 교단의 신학에 갇히고, 서로 반목하는 동안 성서의 본질을 교회와 역사에 되살리는 데는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이 터부를 벗고 손을 잡은 채 이런 행사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개신교에선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평양대부흥 100돌을 조명하는 자세는 ‘부흥’과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교단들의 100돌 맞이와는 달랐다. 이들이 평양대부흥을 통해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 부흥인가, 변화인가
지금까지 평양대부흥 100돌 행사 준비가 당시의 성공신화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란 지적들이 이어졌다. 한국신학정보연구원을 통해 지난 10년 동안 매년 6차례씩의 세미나를 통해 진보-보수 신학자들이 터놓고 대화하게 했던 연구원장 김정우(총신대신학대학원)교수는 “1903년 원산서부터 1907년 평양까지 부흥회는 회개와 소통의 장이었다”며 “부도덕한 삶과 축첩제도와 문맹과 미신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 문명사적 전환을 경험한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한국신약학회 회장인 이달(한남대 신학대학원장)교수는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변화됐구나’라고 느낄 만큼 성격이 변한 것”라면서 “참된 부흥은 자기 변화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총무 이민규(한국성서대)교수는 “백범 김구 선생은 ‘경찰서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가 그런 유익한 존재가 아닌 것에 통감하고 각성하면서 내 스스로 먼저 참회한다”고 밝혔다.
■ 성서인가, 현실인가
보수파는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강조하는 반면 진보 파는 성서를 현실 속에서 부활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 마련이다. 김정우 교수는 평양대부흥이 한국 교회가 탈역사주의로 가는 한 계기가 되었다”며 “그러나 교회가 민족을 껴안아 민족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보았다. 왕대일 교수는 “평양대부흥운동이 100만인 구령운동이란 제도적 운동으로 전환된 이후 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는 실패했지만, 3·1운동 등 항일 민족운동의 기반 세력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 분열인가, 화해인가
한국구약학회장 왕대일(감신대)교수는 “평양대부흥을 통해 장로교와 감리회가 하나가 되려고 ‘조선예수교교회’라는 이름까지 지었다”며 “그러나 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반대로 통합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정우 교수는 “우리 신학자들이 성경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대립과 분열의 해석학’을 반성하고, 복음의 빛 속에서 참된 ‘화해와 소통의 해석학’을 세워 교회와 사회와 민족을 껴안고, 21세기의 세계를 향한 학문적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1907년 회개 릴레이… 개신교 토착화 계기 ■
평양대부흥은 놀라운 회개운동이었다. 1907년 1월 부흥회에서 길선주 목사 등이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실로 고백하면서 장내가 눈물 바다를 이룬 뒤 앞다투어 회개한 회개 릴레이가 펼쳐진 것이다.
이 때 선교사들은 자신의 편견과 교만에 대해 공적으로 회개하고, 한국의 교인들은 선교사들에 대한 미움과 질시를 회개했다. 그 때 살인죄와 도둑 등 사적인 비밀을 남김 없이 털어놓은 부흥회장은 ‘지옥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고백과 용서 속에서 부흥회 전엔 양반과 상놈들이 예배당 안에서도 따로 앉았는데, 부흥회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형제의 사랑을 느끼고 함께 앉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1903년 원산부흥회 이후 불과 4~5년 만에 교회수는 2배로 늘었고, 신자수는 3배로 늘어나 개신교인이 20만에 육박해 이땅에 개신교의 초석을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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