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털복숭이 괴승 달마, 나환자 승찬, 미혼모 자식 홍인 등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495, ?~436, 346~495, ?~528 등으로 생몰연대를 두고 이설 존재)에 의해 중국에서 선불교가 시작됐기에 달마는 선종의 초(일)조로 불린다. 달마에 이어 2조 혜가(487~593)-3조 승찬(?~606)-4조 도신(580~651)-5조 홍인(594~674)에 이어 6조 혜능(638~713) 때까지만 붓다로부터 이어온 가사와 발우가 전해졌다고 한다. 혜능 이후 만개된 선불교의 초석을 이들 6대 조사가 놓은 셈이다.
‘견성(깨달음)=성불’로 여기는 선불교에서 선의 조사(祖師)들은 붓다와 같은 참사람의 전형으로 존경받는다. 그러나 원래 이들은 큰 아픔과 상처를 지녔던 장애인들이었다. 남인도에서 온 달마는 중국인들로선 마주하기조차 쉽지 않을 만큼 얼굴이 검은 털복숭이 괴승이었다. 혜가는 출가 전에 불안의 노이로제 속에 살았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은 베어버린 외팔이였다. 승찬은 천형을 받았다는 죄의식 속에 고통 받던 나환자였다. 도신의 출가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불과 일곱살에 절에 맡겨져 삼조사까지 이른 것에서 천애고아였거나 그와 유사한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신의 늙은 제자가 다시 몸을 받기 위해 성적인 접촉 없이 ‘입태’해 태어났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홍인은 이를테면 아버지 성조차 모르는 미혼모의 자식이었다. 혜능은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천대받던 소수민족 어머니를 두어 몸이 아주 작고, 검고 못생겨 오랑캐란 소리를 들었다.
천년이 넘도록 진주처럼 찬란히 빛나는 선사들은 이처럼 상처 속에서 피어났다. 그 점이 아픔과 상처와 갈등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늘어만 가는 오늘날 선사들의 삶과 깨달음이 더욱 절실히 다가서는 이유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9년 면벽수도 달마, 성전과 허례허식 깨부수고 종교혁명
140살이 넘은 고령의 달마가 3년의 여정 끝에 도착한 중국은 불교가 전래된 지 400여년이 넘어 기복(복을 빎) 불교가 만연한 상태였다. 절과 성전을 짓는 게 종교의 본분인 양 여겨지는 오늘날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석가로부터 이어진 ‘다르마(진리)’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인도에서 온 고승에게 양나라 황제 무제는 자신이 수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번역했고, 승려를 배출한 것을 자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달마는 단호하게 “아무 공덕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서 버렸다.
달마의 9년 면벽은 진리가 들어갈 구멍이 없는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일 수 있다. 달마의 선은 성전이나 허례허식과 같은 형식과 권위가 다르마를 대신해버린 거짓을 부수는 이단자였다. 종교 혁명이었다. 달마의 독살설과 2조 혜가가 모함으로 살해당한 데서도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건물이나 권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지는 다르마의 항해도 순조롭고 한가한 말장난이 아니라 이런 풍파와 치열한 도전 속에서 시작됐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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