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노동사목 대부’ 도요안 신부 서품40돌
40여년 한국서 노동자들이 친구신장에 척추까지…투석 고통“행복하지 않았다면 떠났을 것”
“신부님. 저 000입니다. 저 모르시겠어요. 신부님이 계속 병원에 찾아와 주셨잖아요. 저도 이제 60이 다 됐어요. 나이가 드니 신부님이 생각나 수소문했어요.”
며칠 전 도요안(70)신부는 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는 70년대 명동에서 유명한 맥주집이던 유토피아에서 일하던 웨이터였다고 했다. 유토피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와 손을 잡아주며 위로해주던 도요안 신부를 잊지 못하고 전화한 것이다. 도요안 신부는 그렇게 대연각 호텔에서 불이 나 어린 웨이터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의 친구와 동료들이 잔업과 저임금에 지쳐 쓰러질 때도, 영등포와 구로의 작은 작업장에서 일하다 근로자들이 손가락이 잘렸을 때에도 아픈 그들 앞에 나타나 따뜻한 미소로 그들의 불안을 녹여주었다.
그 노동사목의 대부 도요안 신부가 사제가 된 지 만 40년이 됐다. 서품 40돌 기념 미사가 열린 지난 15일 모처럼 그를 찾아온 옛 노동자들은 많이 야위고 목발을 짚은 그를 보고 목이 메었다. 늘 노동자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그가 많이 아픈 것이다.
그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5가 14 가톨릭노동사목회관 7층에 산다. 신장암으로 신장 하나를 완전히 떼어낸 뒤 나머지 신장에도 종양이 생겨 그마저도 절반을 잘라내 매주 두 번씩 투석을 해야 하고, 종양이 척추까지 손상시켜 척추 뼈 이식 수술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도요안 신부의 얼굴엔 아픔의 그림자가 없었다. 여전히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은 소년 같은 모습이다.
미국 뉴저지 돈 보스코 신학대 학생이던 그가 한국에서 봉사의 삶을 다짐하고 1959년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만도 공항은 콘센트 청사였고, 영등포까지 길도 비포장이었다. 광주 사레지오고에서 3년 간 영어를 가르친 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신부가 된 그는 1968년 다시 귀국해 공장지대였던 영등포의 도림동 성당에서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고, 1971년 설립된 노동사목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겐 암울한 시절 아파하는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행복하지 않았다면 떠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를 찾아오는 옛 노동자들은 “아무데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우리들이 사목위원회에서 신부와 동료들과 앉아 많은 얘기를 나누며 인간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곤 한다.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의 노동문제에 정통한 그는 “비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저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많이 버는 프리랜서들이 있다”면서 “이주노동자 문제도 고용자와 노동자로만 나눌 수 없는 것이, 지금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분들이 대부분 소규모 사업장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처지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그는 또 보수언론에 의해 ‘귀족노조’로 비판받곤 하는 대기업 노동자들과 관련해선 “노동자들이 임금을 많이 받는 것을 배 아파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자꾸 임금이 높아지다 보면 공장이 외국으로 이주해 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노동사목위에선 요즘은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과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도요안 신부는 “멕시코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미국이 멕시코의 출산율이 저하되면서 제발 이주노동자를 좀 보내달라고 사정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이주노동인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오고 있으므로, 그들을 우리의 필요에 의해 함께 살아야할 사람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800여쌍의 주례를 볼 정도로 노동계의 ‘인기 스타’였던 그는 “재미있게 주례사를 해서 그렇게 인기가 많으냐”는 물음에 “예식장에서 엄숙하지 않게 유머를 하면 어르신들이 외국인이라서 법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말끝마다 “우리나라”라며 “우리나라에서 살다 우리나라에서 죽을 것”이라는 도요안 신부가 목발을 짚고 산책길에 나서며 배웅해주다 “또 놀러 오라”며 손을 흔든다. 100년 된 장맛 같은 손짓이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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