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대각개교절 앞두고 만난 원로 박장식 종사
불교에선 ‘나’란 관념이고 허상이며, ‘무아’(無我)는 깨달아야 할 실상이라고 한다. ‘내’가 있어 ‘내’가 살기 위해 너를 해치는 고해바다가 비롯되기에 ‘무아의 깨달음’은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그래서 원불교에선 ‘내가 없이 공익에 헌신’하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을 ‘원만한 인격’의 표상으로 여긴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어 원불교를 개창한 92번째 대각개교절(28일)을 앞두고 전북 익산 원불교중앙총부 안에서 정년퇴임한 교무들이 머무는 ‘도인촌’인 원로원을 지난 20일 찾았다. ‘무아봉공’의 전형인 상산 박장식(97) 종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너무 연로해 만나보았자 별무소득일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뒤로한 방문이었다. 그런데 꽃잔치를 벌이는 원로원 정원의 아름다움도, 백마디 말도 그의 표정 앞에선 그저 무색해질 뿐이다. 세속을 초월한 듯 감은 눈은 이미 적멸을 보여주는데, 젖먹이처럼 뽀얀 피부는 오히려 천진한 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는 1938년 원불교에 입교한 이후 ‘항상 산’(상산·常山)처럼 흔들림 없이 원불교를 지켜왔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한 지 64년이 지났기에 교조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열반에 들었다. 상산은 바로 이제 몇 남지 않은 교조의 직제자다. 더구나 그의 입교는 원불교 교단 초기부터 큰 화제였다. 전라도 제일의 명문가의 하나인 남원의 죽산 박씨 몽산재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경성 법학전문대학(서울대 법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기업체를 이끌던 전도양양한 젊은이가 소태산을 만난 지 2년 만인 1940년 신생 종단에 출가한 때문이었다.
상산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소태산과 만났던 70년 전을 회상했다.
“총부 금강원에 들어갔더니 대종사님이 전부터 잘 아는 사람처럼 만면에 인자하신 미소를 지으시고 정겨운 음성으로 ‘올 줄 알았다’고 하는데 그만 말문이 막혔어요.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만났던 신선이 바로 내 앞에 있었어요.”
소태산의 권유로 그날부터 10일간 ‘동선’(겨울참선)에 참여하면서 대종사가 생불이란 소문이 허언이 아님을 느낀 그는 대종사가 계신 곳이 진리를 발견하고 인생의 지표를 발견할 도량이라고 확신했다. 소태산 생전을 회고하는 사람들은 당시 소태산이 가장 아낀 애제자로 상산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유일학림에서 상산에게 배운 제자이면서 이제 원로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이기도 한 민산 김삼룡(75) 전 원광대 총장은 “내가 보기에 남자로선 상산님과 여자로선 이공주, 황온순이 대종사님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제자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상산님이 그토록 사랑을 받은 것은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위치를 모두 버리고 귀의한 뒤 털끝만한 사심 잡념이 없이 마음공부에 모든 것을 바치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산은 해방 이듬해 설립한 유일학림(원광대학교 전신)의 초대 학장을 맡았다. 원로원에 함께 사는 원로들조차 대부분 유일학림 등에서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다. 이어 1962년부터 71년까지 교단의 행정 수반인 교정원장을 지냈다. 당시 원광대에 입학했던 김주원(59) 중앙중도훈련원장은 “교단의 어른이 늘 우리 학생들과 똑같이 김치 두가지뿐인 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명문가 지식인청년, 소태산 만나 큰 깨달음100살 다됐어도 흐트러짐 없이 정진 ‘귀감’
100살이 다 된 지금까지도 상산의 삶은 그대로다. 소태산의 설법인 〈대종경〉을 공부하는 모임에 빠지는 법이 없고, 일상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원로원의 장산 황직평 종사는 “사심이 없는 삶이기에 우리 모두 존경한다”며 “대종사님께서도 남모르게 공덕을 쌓는 그를 ‘밀행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의 확인을 부탁하자 상산은 “사람들은 말을 붙이기를 좋아한다”며 “나는 그렇게 칭송 받을 사람이 못 된다”고 말했다. 칭송 받을 ‘내’가 없어서 천하 자연이 바로 내가 된 것인가. 상산을 부축해 잔디 마당으로 나서니 온갖 꽃과 나무가 극락을 장엄하고 새들은 정토를 노래한다.
익산/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종법사 자리 고사하고 후배천거30살 어린 지도자에 엎드려 큰절
교단 ‘수호신장’ 박장식 종사
1994년이었다. 원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대산 김대거(1914~98) 3대 종법사가 사임하자 상산 박장식 종사가 다음 종법사를 이어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상산은 “젊은 분이 교단을 힘 있게 이끌어가야 한다”며 고사했다. 그러자 강력한 추천으로 인해 선거가 치러졌고, 불과 56살이던 좌산 이광정 종사가 간발의 차로 4대 종법사로 선출됐다.
그러자 좌산의 수십 년 선배들이 대부분인 원로원에선 한참 후배인 새 종법사에게 인사를 가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상산은 어느새 법복을 갖춰 입고 길을 나서고 있었다. 때마침 교단 원로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새 종법사가 원로원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를 본 상산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새 종법사에게 오체투지로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모든 원로들이 따라서 절을 했고, 이를 지켜본 수많은 교무와 신도들은 84살 원로가 젊은 후배를 교단 수호의 ‘법주’(진리 수호자)로 모시는 모습에 눈시울을 적셨다.
구한말 이후 등장했다 카리스마를 지닌 초기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 교단의 종통을 노린 싸움으로 사분오열된 이 땅의 수많은 신흥종교들과 세속 선거판 못지않은 갈등과 잡음을 낳고 있는 기존 종단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단번에 씼어내며 교단을 반석에 올리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말 좌산이 스스로 사임한 뒤 경산 장응철 종사가 5대 종법사로 선출된 날에도 상산은 오체투지로 새 종법사를 맞았다. 처음 총부에 들어와 당시 교정원장이던 상산의 방 청소를 하면서 상산을 모셨다는 경산 종법사는 “자기 실력으론 100으로 달려야하는데도 120, 130으로 과속하는 세속과 달리 도가에선 도력을 감추어 살아가는 불보살들이 있다”며 “상산님이야말로 교단의 화합 융화를 지키기위해 자신의 모습을 감춘 숨은 도인이다”고 말했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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