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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상극의 병을 상생의 삶으로

등록 2007-08-13 19:14

원불교 ‘종법사’ 물러난 이광정 상사

간 상한데다 당뇨…평생 병과 함께지난해 종법사 물러난 뒤 야인 생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처럼 지난해 11월 홀연히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 직을 놓은 좌산 이광정 상사(71·사진)를 지난 9일 경기도 남양주 축령산 오덕훈련원에서 만났다. ‘상사’란 종법사를 퇴위한 이를 존대해 추존한 호칭이다. 아무도 ‘가야할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스스로 퇴장을 결심해 원불교 교도들로부터 눈물의 환송을 받으며 야인으로 돌아갔다. 마치 한 달 뒤 자신의 발병을 예상하기라고 한 듯이. 그는 종법사직을 그만둔 뒤 장협착증으로 장을 90㎝나 잘라내면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응급 상황에 대비해 병원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는 곳에 머물라는 원광대 의료진의 권유에 따라 전북 익산 미륵산 기슭에 머물고 있는 그는 발병 뒤 처음 이곳으로 출행해 2주째 머물고 있다.

산책을 마치고 축령산의 운무 사이로 나타난 그는 병고에 찌든 환자와는 거리가 멀다. 몸은 야위었지만 그 기운은 오히려 산과 하나가 된 산신령의 모습이다. 그에겐 병조차 축복이 된 것일까. 마치 첫사랑을 만나듯 밝으스레 짓는 미소 어디에서도 병고 같은 것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그는 평생 ‘병과 함께’ 살아왔다. 평생 독신 수도자로 삶을 서원하며 수행에 정진하던 그는 20대에 간이 크게 상해 ‘완치 불능’의 판정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40대엔 당뇨병을 얻었다. 간 질환은 잘 먹고 쉬어야 낫는 병인데 반해 당뇨병은 조금만 먹고 운동을 많이 해야 낫는 병이다. ‘함께 할 수 없는’ 상극의 병을 한 몸에 동시에 갖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두 병 사이에서 살얼음을 딛듯 설설 기며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마치 살얼음 위를 달리는 능란한 스케이트 선수처럼 주위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삶 위를 달려갔다. 그가 종법사 퇴임 전 여름 울산시 울주 배냇골청소년수련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낮 기온이 39도로 성한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위를 먹을 정도의 날씨인데도 아랑곳 없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사과나무를 덮어버린 풀을 베어주고 가자며 도시락을 옆구리에 차고 사과밭으로 향했던 그였다. 그 때 함께 비지땀을 흘렸던 사람들은 병과 더위도 잊은 채 일삼매에 빠진 그를 축복하듯 하늘에 아름다운 오색 해무리가 떠오른 장면을 잊지 못한다.

한반도 상극이 정신적 지도국 될 ‘양약’“상대에 대한 선입견 가장 경계해야”

그런 그가 종법사 퇴임 뒤 머문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구룡마을에도 몇 개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산에 오르내릴 때마다 부대를 옆에 들고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본 등산객과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와 폐자재를 버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쓰레기 더미로 늘 지저분했던 미륵산이 어느새 말끔해졌다.

그러니 이곳에 와서도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다. 그는 새로 지은 건물 주위로 어지럽게 자란 잡풀을 베고 잡목을 잘라내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했다. 이처럼 그가 가는 곳이 어디든지 거친 잡목 숲은 깔끔한 숲길이 되고, 산발한 묵정 밭은 아기자기한 정원이 된다. 선경처럼 아름다운 익산 원불교 총부의 정원에도 종법사 시절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나무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가 한시도 쉬는 법이 없으니 모시는 사람들은 죽을 지경이기도 하다. 등산을 가서도 산위를 평지처럼 달리는 그를 따를 수 없어 숨만 몰아쉴 뿐이다. 매사에 빈틈이 없는 그의 하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강함보다 더한 부드러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그도 없었다. 제자들은 늘 그의 곁에 잠시라도 머물기를 원한다. 오덕훈련원엔 모스크바국립대를 나온 전도양양한 러시아 화학자 아브데예브 미하일(34)이 원불교 수도자가 되기를 서원하면서 스승의 곁뉘라도 쪼이겠다며 며칠 째 머물고 있다. 이날 좌산 상사를 모시고 축령산 계곡 산책길에 나선 미하일은 갑자기 불어난 계곡 속에 징검다리를 놓기 위해 돌을 던진다는 것이 그만 물을 틔게 했다. 이로 인해 부처님처럼 존경하는 스승의 옷에 흙탕물이 몽땅 튀어버렸다. 그러나 미하일은 다음 순간 진흙 속의 연꽃처럼 미소 짓는 한송이 연꽃을 보았다. 며칠 전엔 이제 갓 출가를 서원한 간사의 양말을 빨아서 내어준 좌산 상사였다. 어린 간사가 자기도 모르게 흘린 양말을 주어 몰래 빨았던 것이다.

그런 스승에 그 제자일까. 누군가 이날 그에게 전북 진안 만덕산훈련원에 사는 그의 제자 최인성 교무가 유기농효소를 만들다가 한쪽 손가락들이 몽땅 잘리고 말았다는 비보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비보만이 아니었다. 여리디 여린 여성 수도자의 변고에 가슴이 아픈 도반들이 최 교무를 위로하자 “이 일을 하다가 내가 상했으니 망정이지, 밖에서 온 인부가 다쳤으면 어쩔 뻔 했느냐”고 했다는 얘기였다. 이 말을 들은 좌산 상사는 “최 교무가 손가락이 잘렸지만, 그런 살신성인의 마음을 냈으니 많은 사람을 살려낸 것과 같다”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퇴임 당시 전국의 산을 다니면서 세계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한대로 기도의 마음을 잃지 않던 그는 며칠 전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누구보다 반겼다. 그는 “극단적 진보나 극단적 보수로는 만나 어우러지기 어렵다”면서 “상대에 대해 미리 단정하는 선입견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극의 병을 중용의 도를 취하며 상생의 삶을 살게 한 수행의 동력으로 삼은 그는 한반도의 상극이 오히려 다양한 세상에서 정신적 지도국이 될 양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온갖 병고 속에 살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었던 그 자신의 삶처럼.

남양주 축령산/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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